KTX를 타고 여행을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냥 여행이라고만 하기는 그렇고, 놀러 간 것도 아니고 조금 급하게 다녀온 일이었으니 그냥 'KTX를 탈 일'이 있었다고만 하겠습니다. 그전에도 KTX를 타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조금 특별했습니다. 기차 타고 가야만 했던 용무는 상관이 없습니다. 밤기차였으니 딱히 창밖으로 본 것이 평소와 달랐다는 말도 하기 힘들겠네요. 보인 게 있어야 뭔가 달랐다고 할 텐데, 터널 안이나 밖이나 비슷했으니 말입니다.
차표에 찍힌 시간을 보고 서울역에는 약 20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커피라도 마실까 하다가 시간이 너무 어중간해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때 제 손에는 조그마한 가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뭔가를 구입할 때 사은품으로 준 게 아닌가 싶은데, 요즘 들어 여기저기서 사은품으로 많이 주는 가방입니다. 기내용 가방 같은 디자인인데 크기가 작은 것, 그러면서도 뒷면 쪽에는 밴드가 있어서 실제 여행가방에 끼워서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가방입니다. 하지만 지퍼 외에는 잠금장치라던가 보안을 생각한 그런 건 없어서 손에 들고 다니는 게 제일 안전하지요. 여기에는 간단한 짐과, 더워서 벗어서 돌돌 말아 넣은 점퍼가 있었는데요, 이 중 특별한 여행으로 만들어 준건 바로 전자책과 롤리 키보드였습니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바로 전자책과 롤리 키보드를 꺼냈습니다. 키보드를 펴서 손에 잘 맞추어 놓고 전자책을 켜서 조명을 조금 올리고 스탠드에 놓았습니다. 글을 쓸 준비를 마쳤지요. 그리하여 제가 생전 처음으로 밤기차에서 글을 써본 여행이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밤기차나 비행기에서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는 하나의 로망이었는데 이제 한 걸음 디딘 것입니다. 낮기차에서는 글을 쓰는 것이 로망도 아닌 데다가 글을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왠지는 모르지만 정신이 없어서 글도 제대로 된 것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어제라고 '밤이니까 제대로 된 글이 나왔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낮에는 뭔가가 제게서 나오는 것보다는 창밖을 보면서 제 눈으로 뭔가가 들어가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하철이나 버스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낮에 타는 기차는 지하철이나 버스 취급을 하는데, 그게 단순히 밖이 내다 보여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라는, 전혀 몽환적이지 않은 그런 분위기라서 그런 걸까요?
어쨌거나 이제 비행기에서만 글을 써 보면 로망은 한 번씩 해 본 게 됩니다. 그런데, 어제 글을 써 보니 그 기분이 생각보다 많이 좋더군요. 로망을 이루어서가 아니라, 글을 쓰는 느낌이 꽤나 새로웠습니다. KTX의 테이블은 앞 좌석 아래에서 꺼내서 펴면 비행기 테이블처럼 매우 좁습니다. 테이블 저쪽 구석에 핸드폰을 놓고 가운데 앞에 키보드를 놓고 테이블 한가운데 전자책이 위치하게 해 놓으면 모든 신경이 전자책 화면으로 쏠려서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 환경에서 나온 글이 얼마나 좋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환경이 아니라 저에게 달린 것이겠지요. 하지만 훌륭한 글은 아니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그렇게 KTX에서 전자책과 롤리 키보드를 가지고 쓴 글의 결론이 "전자책이나 롤리 키보드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다 바꿔 버려야겠다."라는 건 정말 아이러니합니다.
그래도 제대로 세팅을 해서 글을 쓰는 건 똑같이 이동 중에 쓰는 글이라도 핸드폰을 들고 쓰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5월 8일의 'KTX에서의 글쓰기' 첫 경험, 매우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