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나갈 일이 있어 급히 움직였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씻은 다음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길을 나섰습니다. 비가 온 후 며칠은 싸늘하더니 오늘은 다시 긴팔 옷을 입으면 더운 날씨가 되었습니다. 길거리에도 반팔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고 저도 반팔을 입고 나올 것을 그랬다는 말도 절로 나왔습니다. 강북에서 분당 쪽으로 이동해야 하다 보니 지하철로는 노선을 세 번씩이나 갈아타야 해서 버스를 탔습니다. 한 번만 갈아타도 약속장소 바로 앞으로 가니 편하긴 합니다. 평일이라는 것을 깜빡했는데 막상 도로로 나가니 차들도 의외로 적어서 예상 시간보다도 10분이나 일찍 도착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 길거리 풍경이 다이렉트로 눈에 들어와서 기분이 좋습니다. 전철을 타면 지하는 지하대로 스크린도어 말고는 볼 게 없는데 지상에서도 요즘은 모두 방음벽이 쳐져 있어 빌딩들만 보일 뿐 사람들과 길거리는 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버스를 타면 마치 사람들 사이를 지나는 것처럼 인도를 구경하고 다니는 재미가 있습니다.
집에서 나올 때는 그냥 어제보다 따뜻해진 것 같다, 정도의 생각을 했지만 막상 버스 정류장에 서 있어 보니 그늘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을 정도로 햇볕이 뜨끈했습니다. '오늘은 다시 비 오기 전처럼 따뜻하려나 보다'하고 생각했지만 이미 집에 들어가서 반팔로 갈아입고 나올 시간은 없었습니다.
버스에서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풍경도 확실히 더워진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미 자동차들은 마치 아지랑이가 보이는 것처럼 뜨거워 보였고, 사람들도 손으로 눈 위를 가려서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간판들도 햇빛에 반사되어 바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산책하는 강아지들도 모두 하나같이 혀를 내밀고 걷고 있었고요. 약속이 아니었다면 버스에서 내려 이태원 거리를 한 번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이태원에 와 본 건 2년 전 이맘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전이라고 자주 와본 건 아니지만, 낮에만 와 보았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였지요. 하지만 예보에 없던 비가 갑자기 내렸기 때문에 그런 건 볼 틈 없이 그냥 다시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던 기억입니다. 오늘은 큰 길가부터 그 뒷골목까지 샅샅이 훑어도 기분이 좋을 것 같은, 딱 맞는 날씨와 딱 맞는 습도였습니다.
모든 자동차에 공평하게 햇빛이 내리쬐는 한강 다리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해서 나와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가로수들이 모두 밝은 초록색이었습니다. 버스에서는 사람들과 가게들을 보느라 가로수에는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는데, 가로수야말로 여름이 다가오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약속을 기다리느라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미니 케이크 하나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통유리로 된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유리창 위쪽에는 내부에 바깥을 향해 스타벅스 로고를 달고 불을 켜 놓았는데, 유리창에서 살짝 떨어져 있어서 불 켜진 로고가 반사되어 창 밖 풍경과 겹쳐 보였습니다. 마치 풍경에 스타벅스 워터마크를 새긴 것처럼 보였지요. 길 건너편에는 가로수 그늘과 건물들이 있고,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보행자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햇빛이 아무리 강해도 낮이라서 그늘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표정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횡단보도 한가운데로 나오자 햇빛에 반사되어 얼굴이 하얗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머리카락은 햇빛이 닿는 부분이 약간 노란빛을 띠는 은색처럼 되었습니다. 단지 햇빛의 반사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럼에도 그늘에서 햇빛으로 배경이 바뀌는 순간 색이 변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햇빛을 보니 문득 "자수하여 광명 찾자"라던 문구가 생각납니다. 거기서 말한 광명이라는 것이 저 빛만큼이나 또렷한 대비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들도 자수하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생각난 문장을 한 번 더 입 속에 머금고 포크로 미니 케이크를 1/6만큼 삼각형으로 잘라 입에 넣었습니다. 쫀득쫀득해서 부서지거나 잘리지 않고 한 번에 입 속으로 들어옵니다. 미니 케이크가 초코, 그것도 두 겹으로 된 더블 초코 무스 케이크라서 크림 케이크보다 조금 더 단 맛이 납니다. 부드럽게 혀로 녹이듯 먹고 나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머금고 다시 삼켰습니다. 진한 단 맛 뒤에 고소하고 쓴 맛이 지나가니 마치 카카오 72%를 먹는 기분입니다. 햇빛에 빛나는 하얀 횡단보도 위로 더 하얗게 보이는 자동차가 유리창을 반짝거리며 지나갑니다. 단 것을 먹고 나니 손이 끈적끈적한 느낌이 납니다.
한여름에는 손에 남은 땀의 소금기 때문에 끈적한 느낌이 나는 것과 단 음식을 먹다가 손에 당분이 남아서 끈적한 느낌이 나는 것이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사실, 구분할 필요 없이 둘 다 곧바로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게 되는 요인이기는 합니다. 추울 때는 땀 때문에 끈적거릴 일은 없기도 하지요. 그래서인가 이런 느낌이 나면 더운 계절이 생각이 납니다.
더운 날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네댓 시간 만에 점심을 먹고 집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올 때도 갈 때와 똑같은 버스를 타고 똑같은 경로로 이태원을 지나왔기 때문에 산책하러 내릴까 말까 하는 고민을 다시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덥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런 고민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고 싶은 생각이나 거리를 둘러보고 싶은 생각보다 빨리 집에 가서 허리를 펴고 눕고 싶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반팔셔츠를 입고 있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싶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이태원에도 거리에 보이는 사람이 오전에 비해 너무 많아서 그런 생각이 없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돌아오는 길에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겠네요.
휴가다운 여유, 그거 하나면 오늘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