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상으로 사용하는 안방 화장대에 팔을 괴고 30분째 앉아 있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따라가다 보면 원점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그래서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해 보지만 그럴 수도 없다.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전의 고리를 풀어야 하고 그 고리를 풀기 위해서는 그 전의 고리를 풀어야 하고,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그 전의 고리를 풀어야 하고, 결국은 처음의 그 고리로 돌아와 버린다.
어젯밤 우리 집에서 지영이가 자고 갔다. 술을 많이 마셔서 어쩔 수 없이 집에 데리고 왔는데, 창고로 쓰는 방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친구들이 나를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술을 많이 마셔서 챙길 여유가 없어 그 방에 눕히는 것까지만 보고 친구들을 보냈다. 그 방에는 사방에 쌓여 있는 책들 사이로 오래된 조그만 소파가 하나 있다. 먼지가 쌓여 있기는 하지만, 세탁한 수건들 사이에 함께 끼어 있는 꽤 커다란 담요를 그 위에 덮고 거기에 지영이를 눕혔다. 그리고 담요를 하나 더 꺼내와서 위에 덮어 주었다. 혹시 몰라 이미 먼지가 쌓인 그 옆 책상 위에 물을 따른 물컵도 올려놓았다.
그러고 나서는 나는 침대로 와서 잠이 들었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깐 깼지만 그때는 지영이는 까맣게 잊고 주방에서 물만 마시고 다시 들어왔다. 친구들에게 안 된다고 말을 했어야 했을까 하는 연결고리가 있는 곳은 여기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라 전날 술을 마셨음에도 일찍 눈이 떠졌다. 월요일을 모두 공강으로 채우는 것은 대단한 능력과 계획을 요하는 일이다. 나는 이미 2학기에 배워야 할 과목 중 수업이 가장 적은 것을 1학년 때 수강을 해 놓았다. 어렵긴 했지만 모두가 어려워했던 탓에 한 학년이나 일찍 들었음에도 B+를 받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 내 동기들도 그 정도에서 만족할 것이다.
물을 마시고 컵을 씻었는데 컵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술김에 떨어뜨려서 깨뜨린 게 아닌가 하고 깜짝 놀라 바닥을 찾아보았지만 유리 조각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필름이 끊긴 사이에 다 치우고 잤을 수도 있지만 쓰레기통도 깨끗하다. 어제 아침에 나가는 길에 쓰레기봉투를 갈았는데 그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영이가 들어왔던 기억이 돌아와서 창고 가방으로 가 보았더니 지영이가 자고 있었다. 소파에 구겨져서 잠을 자려니 불편했는지, 남방의 위쪽 단추 서너 개와 청바지의 단추가 풀어져 있다. 깨끗하게 세탁해서 덮어준 담요는 옆의 먼지 투성이 책을 덮어 주고 있었다. 소파에 한 장 깔아주었으니 하룻밤 사이에 두 장의 세탁용 담요가 나왔다.
"지영아"
"지영아"
지영이가 눈을 뜨고 쳐다보았다. 방을 둘러보더니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다시 내 뒤로 방문을 보더니
"아, 너네 집이구나. 기억난다."
라며 웃었다. 그리고 남방과 바지를 만져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단추를 채운다.
"지금 몇 시야?"
"지금... 여덟 시."
"앗, 나 1교시 수업 있는데, 안 늦으려면 언제 나가야 돼?"
"여덟 시 반에는 나가야 하지 않을까?"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는 급히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주방으로 와서 해장을 할 겸 라면을 끓였다. 그런데 10분도 지나지 않아 지영이는 뛰어 나가 버렸다. 먼지투성이가 된 담요들을 빨래통에 담아 놓고 라면을 먹었다. 여자친구가 첫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열 시가 조금 넘을 것이다. 친구들이 아마 지영이가 왔다간 것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나는 화장대에 팔을 괴고 앉아 고민에 빠졌다. 정말 급해서 나갈 시간이 아닌데, 저렇게 서둘러 나가느라 욕실의 여자친구가 가져다 놓은 린스와 바디워시를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아니면 그것들을 보았기에 서둘러 나간 것일까? 여러 가지 고리들 가운데 근본적으로 풀어야 할 고리는 여자 친구와 내가 둘이 만난다는 걸 아직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영이가 그것들을 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떻게 둘러대고 빠져나갈지 생각해내야 했다. 그리고 지영이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도 또 다른 고리이고, 다른 남자아이들도 몇 번 자고 가서 비밀번호를 안다는, 즉 우리 집이 일종의 아지트 역할을 한다는 것도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조만간 고리가 끊어질 것이다. 많은 변화가 있겠지.
그런 변화가 온다는 것은 소소하게 이제 이 집이 공식적으로 나와 여자친구만의 공간이 된다는 것이지만 집의 역할이 바뀌는 만큼 집에 대한 자세도 바뀔 것이다. 이제는 친구들에게 술을 많이 마시고 잠시 피할 곳이 아닐 것이고, 더욱이 나에게 혼자 지내기에 충분했지만 둘이 지내기에는 넓지 않은 곳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변화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친구가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