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준비를 마치고 키보드를 치는 대로 한글이 제대로 입력되는 것을 확인한 후 영화 '아논'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검색해서 플레이를 누릅니다. 지금 저는 꿈을 재구성하는 글을 쓸 때의 환경을 만드는 중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면 그냥 키보드와 모니터만 있으면 집중이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사실, 조금 더 욕심을 내는 것뿐입니다. 글을 쓸 때 제가 글을 써 나가는 외적인 분위기는 제게 글의 세계와 현실을 이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글의 흐름을 자주 좌지우지합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빛과 소리가 조절하기 가장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빛은 오후의 서너 시쯤 되는 나른한 햇빛, 또는 주광색 조명, 소리는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음에 드는 음악이면 충분합니다. 전에는 막연히 생각의 흐름을 끊지 않으려면 조용한 음악이 좋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주위가 시끄럽다고 해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데 실질적인 방해가 된다고 보아야 할 것도 아니고 조용한 클래식이라 해서 무조건 집중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한 가지 제가 곡을 선택할 때 조심할 부분이 있었던 것뿐인데, 바로 가사가 머릿속에 꽂히냐 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조용히 흐르는 곡이라 하더라도, 가사가 들리면 생각이 그쪽으로 쏠립니다.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가리지 않고, 알아듣지 못해도 'ㅇㅇ라는 단어 아닐까?'같은 생각만 들어도 바로 생각은 그쪽으로 달라붙어서 기존에 황하처럼 거대하게 흐르던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방해가 되지 않는 곡을 고르는 것은 그쯤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음악을 이용해 글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곡의 분위기는 비슷한 분위기의 글을 쓸 때 많이 들었던 곡이라면 보통 상관이 없습니다. 봄에 대한 글을 쓸 때 듣는 시크릿가든 밴드의 곡이나, 사막에 대한 글을 쓸 때 많이 듣는 엔야의 베스트 앨범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제는 가사도 알고 곡도 익숙하지만 그 때문에 방해가 되기보다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이 훨씬 커서 생각의 흐름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오늘은 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아논을 선택했습니다. 혼자 생각에 잠겨서 간밤에 꾼 꿈을 가만히 되돌아보며 글을 쓸 때 많이 틀어 놓는 곡입니다. 꿈속을 더듬느라 가만히 있어야 할 때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아줍니다. 생각의 흐름대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는 졸음이 와서 듣지 않는 곡이지만 꼭, 꿈에 대해 생각할 때는 이만한 앨범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논의 경우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이고, 보통 이렇게 제 나름대로 사용할 분위기가 정해져 있는 곡들은 2000년대 초반 이전까지의 앨범이 많습니다. 그때까지는 테이프나 CD로만 음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 번 틀면 한 앨범만 계속해서 반복재생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손안에 쏙 들어오는 MP3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는 그렇게 참고 있을 만한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런 앨범도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CD를 들을 때도 아마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사용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요. 저는 CD는 집에서 스피커가 달린, 꽤 출력이 괜찮았던 플레이어로 들었으니까요. 책을 읽으면서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음악 소리 가운데 있으면 그 분위기 안으로 침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는 휴대용 플레이어가 있기는 했지만, 테이프가 늘어날까 싶어 되감기, 빨리 감기는 잘 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이 글의 분위기를 끌고 갈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한 일입니다. 제가 이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면서였습니다. 집에 클래식 CD 세트가 있었는데, 대부분 모르는 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은 공부가 잘 되고 어떤 것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천차만별이었던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니 그런 게 없다고는 하지만 제게는 너무 강렬해서 실제로 저 하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보통은 고등학교 시절 '내가 특별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던 일들은 대부분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나지요. 그 친구들에게도 싫어하는 가요 장르를 알려 달라고 하고 그것을 틀어 놓고 공부가 잘 되는지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CD가 용돈에 비해 비싸서 실제로 그럴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분위기를 잡으면 음악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반복 재생 설정이 되어 있는지만 확인하고 나면 바로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곡은 이제 글쓰기가 다 끝나고 나서 제가 플레이어를 종료할 때까지 힘겹게 분위기를 끌고 갈 것입니다. 마치 소가 밭을 갈듯이 모든 분위기를 제가 글을 쓰면서 누리고 싶었던 그 분위기가 유지되도록 한 방향으로 정리해 주겠지요. 이제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