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에는 그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어느 수준까지 이루어내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정도가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일 수는 없고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능력, 체력 등에 따라 암묵적으로 정해지고 동의하는 한계이다. 올림픽처럼 객관적인 기록이 있어서 어떤 기록을 돌파하느냐 하는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저 사람은 정도면 최선이야' 정도일 것이다. 자신의 화풍을 정립한 화가, 자기만의 창법으로 자기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 가수들이 그럴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다. 그것들은 최초에 만들어 내는 것이 힘든 일일 뿐, 그 작품이 퍼지는 데에는 마치 스스로 번식을 하듯이 그것을 좋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 많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작품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려면 애초에 그 작품을 접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야 하는데, 여기서 다시 자본의 문제가 튀어나올 수 있지만 그것은 이 글에서는 완벽한 논외다. 왜냐하면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그렇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를 보면 노인이 그 커다란 다랑어를 잡게 된 계기는 자신의 능력이 아직은 시들지 않았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이 무시를 하거나 험담을 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자존심을 더 깎은 '동정'에 반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복된 도전에 스스로도 운이 더 이상 따라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그 자존심은 표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 평생토록 갈고닦은 모든 기술을 사용하여야 할 만한 상대를 만났고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붓고 나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되찾게 된다. 더 이상 고기에 살이 남아 있지 않아 자랑할 건덕지도 없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쏟아부은 노력의 진정한 결실은 남에게 보여줄 고기보다는 다랑어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스스로 자신 있게 선언한 것이었기에 그 결과에 대해 증명하고자 하는 생각보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할 수 없게 된 데 대한 무력감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걸고 달려본 사람의 후회 없는 질주가 끝난 것뿐이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은 보는 사람이 있고 보는 사람이 만족스러워야 한다. 그것이 존재의 목적이다. 사람은, 바로 전까지는 동양에서는 우주의 질서를 '의지를 가지고' 땅에 그대로 이루어내는 것, 서양에서는 신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는 특히 우리 한반도에서는 유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원리를 인간관계에 이식하고자 했고, 서양에서는 오래도록 신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때로는 신과 사람 사이에서 스스로를 높이기도 하면서) 신에게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경쟁을 하기도 했다. 그 한계는 명확하다. 어떻게 되었든 우주나 신은 관심이 없고, 단지 사람들끼리 보여주고 경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온 사상 중 동양에서는 '땅 위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유일하게 하늘의 질서를 가진', 그리고 서양에서는 '신을 섬기라는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창조된' 사람이라는 개념이 사람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존재의 이유가 존재해야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니, 그러니까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니 얼마나 명료하고 자신 넘치는 결론인가. 우리가 사람이니 사람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냐는 말도 할 수 있지만, 당장 카르타고의 종교나 아즈텍의 종교만 보아도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사람이며, 인류는 인류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중요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국지적인 곳은 여럿 존재하지만 전지구적인 측면에서는, 심지어 그런 곳에서도 말로는 모든 사람이라는 존재는 똑같이 소중하다.
이 말은 생각보다 매우 중요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보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말은 더 큰 뜻을 포괄한다. 어떤 사상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단지 이 문장만 본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은 '인간의 존엄성은 70% 정도 존중받을 수 있겠지만, 모든 인간이 70%로 동등하면 문제가 없어'라는 말이지만, 단지 모두 소중하다고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며, 그 정도의 절대성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 이 존재를 들여다보면 불완전한 곳이 보일 수도 있지만, 우주적인 차원에서 보면 절대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적인 이러한 측면으로만 보아도 더없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생물도 '나는 세상의 어떤 다른 종보다도 우월해'라고 말할 수 있는 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적의 예만 보아도, 사람에게 있어서는 천적이 없다. 단지 화산이나 가스 사고처럼 '피하거나 제거해야 할 위험요소'일뿐이다.
이러한, 그 자체로 위대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러므로 그 자체로서 위대한 존재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은 간단하다. 누군가 그렇게 인정하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 지나가다가 버려진 깡통을 보고 감탄하며 '정물화의 구도상 정말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각도로 찌그려져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인간들 뿐이다. 아무리 대다수가 달려들어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낸다 할지라도, 인류 중 누군가가 그런 평가를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예술 작품 역시 만드는 사람이 평생의 모든 기술을 사용해 모든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하면, 그것은 그가 그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팔리지 않거나,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다고 해서 그가 그렇게 선언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 예술가가 비싼 값에 팔아먹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했더라도 그 작품에 대해 그렇게 꼬리표를 달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있는 것은 인류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푸스의 신이 내려와 축복을 한다면 그 축복을 번복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신뿐이다. 그런 축복과 저주 들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류가 신 이상으로 우주의 절대적인 존재가 된 이상 인류 외에는 인류 중 누군가가 만든 예술품을 깎아내리지 못한다.
나의 글은 읽히기 위해 쓰여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읽히지 않을 것을 알고도 쓰여진다. 읽히는 글이 있고 읽혀야만 하는 글도 있지만, 읽히지 않을 글도 늘 존재한다. 수많은 책들이 넘치지만 그 책들이 모두 똑같이 읽힌다면 베스트셀러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글들은 나에게서 '내가 그 시점에서, 그 순간에 만큼은 다른 어떤 일을 했을 때보다, 어떤 글을 썼을 때보다 완벽한 소출이다'라는 꼬리표를 달고 태어난다. 내가 글을 쓰는 능력이 떨어져서일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그보다 잘 쓴 글이 나올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로만 그렇게 꼬리표를 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인류 외에는,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 외에는 폄하할 수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그것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권리이고, 인류 외의 존재들에게는 장벽이다. 또한 그렇게 폄하될 수 있다는 것은 거꾸로, 이 글에게 있어 읽힐 권리이기도 하다. 인류에게 있어 뭔가를 한다는 행위, 그리고 그것이 잘 되었다, 못 되었다 하는 판단을 한다는 행위는 인류의 존재 자체에 감탄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존재의 위대함에 숟가락을 올리기 위해 글을 쓴다. 어쩌면 글을 써서, 혹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려서 잘 숨겨 놓아야 할지 모르겠다. 인류 중 아무도 내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면, 내가 인류 최고의 예술 작품이라고 선언해도 번복되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금세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