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봄날의 대학로

by 루펠 Rup L

일이 있어서 대학로에 다녀왔습니다. 대학로는 항상 활기가 넘칩니다. 한 명 한 명 얼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나름의 걱정은 있게 마련이지만 제가 기분이 좋으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무시하게 됩니다. 제가 기분이 좋지 않거나 걱정이 있으면 저보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아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없는 상태를 즐기는 저에게 문제없음 이외의 것은 풍경이 되지 못했습니다.
휴일에는 종종 종로에 갑니다. 시청에 가서 그때그때 다른 시청 광장의 행사용 부스를 구경하기도 하고 건너편의 덕수궁 앞 대한문에 가서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을 서서 감상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도 때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는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크게는 아니지만 작은 부분에 변형을 주다가 돌아오곤 하는 모습이 가끔 보이는데, 그런 부분을 캐치하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는 걸어서 종각역 영풍문고에 가거나 그대로 광화문역 교보문고에 들르기도 합니다. 보통은 지하철 1호선을 타야 하면 영풍문고, 버스를 타야 하면 보통 세종문화회관 앞으로 가기 때문에 교보문고에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연극 공연을 보기 위해 대학로로 향했습니다. 대학로 자체를 몇 년 만에 간 건 아니고, 공연과는 관계가 전혀 없는 다른 일로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지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대학로 자체가 목적이어서 방문한 건 거의 십 년 만인 것 같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출구를 향해 걷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통로가 좁게 느껴질 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 짧다 뿐이지 삼성역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아마 혜화역 통로가 조금만 더 좁았더라면 사람이 붐비는 느낌이 체감상 더 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삼성역은 대신 역이 크고 길기 때문에 실제로 유동인구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삼십 대로 보였습니다. 숙대입구, 홍대도 비슷하긴 하지만 매번 그런 느낌을 받으면 당황스럽습니다. 예전에 이삼십 대가 제 나이대였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저는 나이를 먹지만 그곳의 유동인구의 나이대는 여전히 그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건 왠지 이상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친했던 친구가 갑자기 저를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요?
역 밖으로 기나긴 계단을 오른 끝에 나왔습니다. 햇빛이 마치 여름처럼 내리쬐었습니다. 어차피 지하철을 타러 갈 때도 오늘은 덥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지하철을 타고 굴 속을 마구 헤집은 끝에 다시 나오면서 맞이하는 햇볕은 느낌의 결이 다릅니다. 아마 집에서 밖으로 나왔을 대의 햇빛과 굴 속에서 나왔을 때의 햇빛의 차이겠지요.
그 햇빛이 처음 말했던 기분이 좋은 상태를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휴대폰을 보고 걷다가 저와 부딪힐 뻔한 여자애도, 손을 잡고 앞으로 걷는데 똑바로 걷지 않고 비스듬히 왼쪽으로 걸어서 뒤에서 걷던 사람들의 길을 막던 노부부도 모두 햇빛에 머리칼이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포장마차에서도 뜨거운 뭔가를 만들어 팔았는데, 마치 햇빛의 따뜻함으로 요리를 하는 걸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햇빛도 햇빛이지만 그 햇빛을 햇빛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저는 한 인간이기 때문에 봄옷을 입은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원색의 티셔츠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분위기라는 건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단지 물리적인 수치로만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봄날이라고 모두가 동의한다,라는 의미의 그 옷차림'들'이 아니었다면 좀비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햇빛은 블록을 한 방향으로 비추고 따라서 그림자도 어느 길로 가느냐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햇빛에 모든 사람을 노출시키기도 했습니다. 제가 들어간 길은 햇빛에 아스팔트가 노랗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남녀들이 극장이나 공연 정보가 코팅된 것을 들고 다니면서 회원 모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갔고, 그 중간을 자동차들이 파고들며 천천히 큰길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거기다 길 한쪽에서는 간판을 달기 위해 크레인이 한 대 서 있었기 때문에 사람도, 자동차도 원래 다니던 길의 반 밖에 안 되는 폭으로 다녀야 했기에 더 복잡했습니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사람 자체가 많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천천히만 가면 사고도 나지 않고 싸우거나 기분 나쁠 일도 없는 그런 상태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봄이라는 뜻이겠지요. 장마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습기가 한증막처럼 공기 전체에 가득 채워지고 나면 그 정도는 사방에서 기다렸다가 가라는 짜증이 들려오고도 남을 싸움 거리일 것입니다.
공연을 보고 나오니 어느덧 저녁때가 다되어 갔습니다. 햇빛은 아직도 쌩쌩해 보였지만 온도는 같지 않았습니다. 햇빛에 채도가 올라가면서 조금 더 서늘해진 기분이었습니다. 포장마차에서 파는 먹을 것도 뜨거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따듯해 보였습니다. 쌀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봄보다는 가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기온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노을 때는 아니었기에 채도가 살짝 올라갔다, 정도만 느꼈지만 노을이 멋질 거라는 것쯤은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산책은 사람의 삶을 건강하게 합니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자체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적는 것으로도 다시 산책을 나간 것 같은데, 그 바람에 덩달아 지금 기분도 무척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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