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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상자

종이인간

2022.11.29.

by 루펠 Rup L

도수는 가만히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집중이 되는 대신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마치 몸이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왜 아무것도 쓰지 않느냐며 비난하며 재촉하는 것처럼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뭔가가 떠오르며 대화를 해야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생각은커녕 여기에 왜 앉아 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가만히 있으니 방 안 공기를 가득 채운 멍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창밖에서 누군가 신발을 끌며 걸어가는 소리와,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모두 들린다. 거실 창가에 꽂아둔 꽃다발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꽃잎 위에 내려앉아 있을 눈부신 햇살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단지, 대화만 되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기에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억지로 쓰려고 머리를 짜낼 때도 있었지만, 주인공이 되실 그분과 대화하는 과정을 거치기 시작한 이래 실패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주인공은 자기의 과거를 솔직히 털어놓고 그 시점부터 미래를 함께했다. 그 주인공이 여자건, 남자건, 노인이건, 어린 아이이건 다를 것은 없었다.
점심때가 되자 배가 고파져 왔다. 신나게 글을 쓰고 있을 때면 손이 아파서 이어지는 내용에 대한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일어난 적은 있지만 배가 고파서 일어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순식간에 지망생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도수는 의자를 뒤로 밀며 엉거주춤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멀리 떨어진 김에 다시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백지. 줄이 그어져 있지 않은 그냥 A4용지였다. 이렇게 A4용지를 날 것 그대로 내려다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종이를 펼치면 주인공을 불러내어 뭔가가 쓰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단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깨끗한 모습은 낯설었다. 혹시, 이 종이가 정상이고, 내가 그동안 이야기를 쓴답시고 이 하얀 종이를 더럽혀 온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종이를 들여다본 지 두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주인공의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이 종이에는 주인공이 없을지도 몰라.’
그는 맨 위의 종이를 옆으로 치우고 A4뭉치에서 맨 위에 있던 다른 종이를 가운데로 펼쳐 놓았다. 여전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혹시 서 있어서 그런 건가 싶은 생각에 다시 의자에 앉아 보았다. 종이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고, 마음속에서는 어느덧 조바심은 사라지고, 자포자기와 비슷한,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분식집에 가서 라면을 시켜 먹고 동네를 느긋하게 걸었다. 공원은 평일 낮인데도 이상하게 사람이 많았다. 햇살이 따스해서 벤치에 앉아 있기도 좋은 날씨였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골목골목, 차가 오면 피하고, 사람을 마주치면 옆으로 비켜주며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도수는 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평소 글을 쓴다며 전화를 해도 받지 않던 시간에 전화를 해서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무척 바쁜 모양이다. 영미는 도수와 일하는 출판사 직원이다. 동갑이기도 하고, 성격도 좋아서 술을 마시고 싶을 때나 주말에 어딘가 가고 싶을 때 불러내고는 했다. 도수처럼 비혼주의자이기도 해서 가족들 눈치 보지 않고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와이프의 허락을 받아야 나올 수 있는 동성 친구들보다 더 편하게 느껴지게 되는 대목이었다.
“아니, 심심해서.”
“글 쓰는 시간 아니야? 만날 얘기했잖아. 꼭 작품을 쓰지 않더라도 계속 뭔가를 끄적이고 있어야 녹슬지 않는다고.”
“그게, 생각보다 잘 안되네.”
영미가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잠깐만, 내가 집 근처로 갈게. 점심시간까지 일을 해서 지금도 나갈 수 있어.”
“아냐, 점심 먹어. 난 먹었어.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도수는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영미가 무슨 직감이 들었는지 그를 붙잡았다.
“네가 그랬잖아. 글 쓰는 방식이 남들과 다르다고. 그 다른 방식이 동작을 안 하는 거야?”
그렇지. 어떻게 여자들은 아무리 앞뒤 없이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도 그걸 저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을 할 수가 있을까.
“그렇긴 한데, 어제까지는 잘 썼고 오늘 처음 그런 거라서 싱숭생숭해서 그랬어. 점심 맛있게 먹고 나중에 연락해.”
“그래, 그럼. 나 점심 먹으면 오늘은 세시까지만 들어오면 되니까 커피라도 필요하면 연락해.”
“알았어. 끊어.”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하지만 증상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았다. 내가 늘 글을 쓰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몇 년 동안은 직장을 다니면서 글 쓰는 연습을 했다. 다른 작가들의 소설을 베끼기도 하고, 중간을 잘라서 나름대로 내용을 이어서 만들어 보기도 했다. 스토리 라인도 짜 보고, 같은 글을 다시 쓰고 또다시 쓰면서 비슷한 내용을 다른 분위기로 써 보는 연습도 수없이 했다. 하지만 간신히 단편이라도 완성하고 보면 여기저기 어색한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단순히 소질이 없는 건가 싶어서 포기하려고 해도 글 쓰는 것이 재미가 있으니 취미로라도 계속 이어 온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종이를 쳐다보다가 문득 혼잣말로 물었다.
“주인공아, 네 이름이 뭐니?”
“제윤이. 박제윤.”
종이가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종이가 아니라 종이 안에 숨어 있는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대답했다. 그 존재가 자신의 이름은 박제윤이라고 대답했다.
“뭐지? 무슨 주인공인데 이름이 그래?”
“뭐긴 뭐야?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핏빛 빌딩의 주인공이지.”
“내가 쓰는 게 핏빛 빌딩이라고? 제목이 왜 그래?”
“난 당신이 쓰는 내용에는 관심 없어. 제목이 왜 그런지도 나한테 얘기하면 안 돼. 당신이 바꿀 수도 있고. 글이 잘 되길 바라겠지만, 솔직히 나는 내 인생만으로도 벅차. 미안해.”
정신 감정이라도 받아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혹시 몰라서 나는 종이 맨 위, 한가운데에 <핏빛 빌딩>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다음 줄에 <주인공 : 박제윤>이라고 썼다. 그녀는 내 소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혹은 나에게 빙의하려고 달려드는 귀신일지도 모르는 존재와 그렇게 오래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미안한데, 귀신이면 나는 그냥 글쓰기를 포기할게. 빙의는 사양하겠어.”
“…”
잠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거부해서 귀신이 물러난 건지, 내가 혼자 머릿속으로 장난을 하다가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발동한 것인지, 그 존재에게 내 의심이 기분 나빴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혹시 귀신이어서 해코지하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그때 다시 대답이 들렸다.
“그래도 글쓰기는 포기하지 말아 줘. 내가 존재는 할 수 있게.”
“내가 글을 써야 네가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인가?”
“응, 맞아. 당신이 글을 쓰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흐릿한 내 존재는 아예 없는 것이 되는 거야.”
“그럼 뭘 물어도 내가 글로 쓰겠다고만 하면 모두 대답을 하는 건가?”
“그래,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해서 나에게 피해가 오는 건 불가능하니까. 단지, 당신이 글쓰기만 포기하지 않으면 돼.”
그렇게 해서 나는 박제윤이라는 사람에 대해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얼굴은 예쁘장한 편이고 나이는 서른이다. 주위에서 대시하는 남자들은 꽤 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가끔만 데이트를 승낙한다. 하지만 신중한 성격으로 인해 실제 연애로 발전하는 일은 드물다. 집에는 부모님과 언니 둘이 있지만 세 자매 모두 타지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 말고는 명절에나 보는 사이가 되었다. 직업으로는 입시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까지 알아보았을 때 분위기가 너무 딱딱한 것 같아 도수가 몇 가지 농담을 했지만, 농담이 통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혹시 그녀 근처의 남자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너무 매력이 없어서 그런 건지 어떤지 궁금해졌다.
“당신이 보기에 나는 어때?”
“무슨 말이야?”
“남자로서라던가,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생각해 봐. 내가 당신을 인간적으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당신은 그저 나의 존재 이유일 뿐이야”
뭔가 쌀쌀맞은 말인 건 맞는데 왠지 낭만적이다. 내가 그녀의 존재 이유라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다. 저런 사실을 알고 살아가려면 얼마나 큰 상실감을 감당해야 할까. 그녀 입장에서 생판 모르는 내가 자신에 대한 글을 써야만 자신의 존재가 그나마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니. 나 없이는 그녀 자신뿐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모든 배경, 온 세계의 존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존재 이유라니 너무 낭만적인 거 아냐?”
내가 물었다. 한편으로는 말장난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울적해져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따라 주지 않았다.
“신을 믿는 건 그냥 믿으면 끝이야. 하지만 그 신을 열성적으로 찬양하는 건, 그 믿음에 기반이 없다는 뜻이야. 어떻게든, 허공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거지. 나는 비관도, 찬양도, 비난도 하지 않아. 그냥 아는 거야.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전지전능할 거라는 상식과 반대로 당신이 오히려 그걸 모르는 것 같기도 해서 말해 주는 거고.”
“그거, 내가 써야 할 말일까?”
“닥치는 대로 적어. 미래는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하니까 지금 상태에서는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거야. 그런 게 아니라도 그냥 이런 말이 나중에 그때그때 써먹기 좋은 말일 수도 있지.”
“글쓰기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국어 선생이라서 그런 건가? 제윤 씨도 글 잘 쓰겠다.”
“연습은 하고 있지만, 그냥 지망생일 뿐이야. 작가인 당신과는 달라.”
작가. 왜 작가라고 생각했을까. 전지전능이 어쩌고 했지만, 그녀는 나를 신이 아니라 직업을 가진 하나의 사람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왜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해?”
“몰라. 아무튼 글을 쓰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글을 쓰는 건 어떻게 알았어?”
“마음속에 소리가 들렸으니까.”
“무슨 소리?”
“제윤은, 잠시 주춤거렸다, 같은 문장들. 그런데 보통은 내 목소리로 들리는데 전혀 내가 알지 못하는 목소리로 들렸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대화까지 하고 있잖아.”
그럴듯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에게 말은 못 해도 어쨌든 나 자신으로서는 귀신도, 내 마음속의 환청도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설명을 따라 빌딩 옥상에서 자살하려다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 옥상에서 사람이 떨어진 것은 그녀를 처음 접하고 이 주일이나 지나서였다. 그동안 그녀의 직장 이야기, 학생들 이야기와 옥상까지 올라가기 귀찮아서 계단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빌딩 옥상에서 자살하려던 사람은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의 부하였다. 그녀와 관련이 없는 회사였기에 그 회사의 분위기 같은 것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자살 시도를 했던 사람이 마음고생을 하던 이유가 그 회사였던 것까지는 대략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제목의 핏빛 빌딩이라는 건 자살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던 어느 날, 그녀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동안 습작했던 것들을 옥상에 모두 모아 놓고 태웠다. 그리고 혹시나 언제 쓰일지 몰라 쌓아 두었던, 그녀가 직접 손으로 써서 모은 국어 강의 교재도 지금 현재 트렌드에 맞는 것들만 추려 내고 나머지는 다 함께 태워 버렸다. 오롯이 현재의 강의와 글쓰기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비장하게 결심하는 순간, 노을에 비친 그 건물의 유리창은 마치 그녀의 혈서인 듯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이 도수가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이었다. 말 그대로 작품의 주인공과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쓴 작품이었다. 어떻게 전개될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결말이 다가오도록 그는 제목이 왜 그 모양인지 알지 못했다. 주인공이 죽는 내용의 스릴러일까 봐 가슴을 졸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도 좋게 끝났고 그녀 역시 옥상에서의 불장난 이후로 그와는 한 번도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스토리가 끝난 것이다. 그날부터는 종이에 쓰인 내용을 시간 순서를 바꾸고 내용을 숨겼다가 뒤에서 밝혀야 할 부분을 골라내는 등 편집에만 힘을 쏟았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완성했지만, 글을 쓴 방식이 그가 이전에 보도 듣지도 못한 방법이어서 다른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게 두 편이 성공하고 그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제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새로운 종이를 두면 또 다른 사람이 나왔다. 처음이 아니었기에 이제는 자신을 밝히지 않고 주인공에 대해서만 물었다. 성공하지 못한 작품들, 발표하지 않은 작품도 모두 이렇게 나왔다. 보통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름을 확인하며
“당신의 이름은 김연성이 맞지요?”
라고 시작하는 대화들. 때로는 대화의 상대가 주인공이 아닌 단지 화자일 때도 있었다. 스토리는 다 만들었지만, 주인공의 이야기가 모두 건너들은 이야기뿐이라 소문일 뿐이어서 소설로도 쓰기 힘든 경우도 있었고, 화자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잘난 척하는 성격을 따라 실제 대답도 죄다 잘난 체뿐이어서 도수가 되레 기분이 나빠서 종이를 찢어 버리기도 했다. 물론, 도수가 기분이 나빠한다거나 종이를 찢는다거나, 종이에 가득 차도록 커다랗게 엑스 자를 친다고 해서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스토리 전체가 끝날 때까지는 도수는 무슨 수를 써도 그 사람과 대화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시작이 제윤이었던 게 다행인 셈이었다. 어느 정도 철학적인 대화도 되고, 스스로에 대한 자각에, 글쓰기 경험이 있어 그의 수준에 맞춘 대화가 가능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종이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황스러웠지만 슬럼프도 있는 법이니까, 하고 넘겼다. 영미와 술을 마시면서 이 모든 이야기를 간단하지만 솔직하게 해 보았다. 영미가 물었다.
“전부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것을 쓴 것도 아니고, 저절로 튀어나온 이야기를 받아 쓴 거라고?”
“맞아. 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 주었어. 이야기가 있어서 해 준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이야기를 해 주었어. 그 자신들조차도 미래에 어떤 결말이 찾아올지는 알지 못했지. 중심 스토리가 뭔지조차도.”
“그 중심 스토리가 뭔지는 너는 그럼 어떻게 알아?”
“그 스토리만 끝나면 그 사람과는 다시는 대화할 수 없었거든.”
“책 한 권이 대화 한 편이라는 거군.”
“맞아. 하지만 이제까지는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적응을 했는데, 갑자기 그게 안 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처음에는 당연하다고 생각이 들었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정말 귀신이 든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것은 첫 번째 책이 완성되고 나서였다. 그래서 책이 성공했을 때도 귀신 덕분에 성공했다기보다는, 책을 펼쳐서 그 책 안에서 제윤을 가리키는 모든 단어, 즉 그녀의 이름을 비롯해서 그녀, 강사, 국어 선생 등등을 형광펜으로 칠해가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었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머릿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말을 해대는 통에 어서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했다. 어쩌면 작가로 성공할지 못할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직장 생활에도 지장을 받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니까.

술자리를 가지고 이틀 뒤, 아홉 시쯤, 도수는 다시 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미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좋았다. 누구에게든 털어놓아야 할, 비밀 아닌 비밀이 생긴 것이었다. 다행히 영미는 외근이 있으니 잠깐 들렀다가 열 시까지 집 근처로 오겠다고 했다.
“아니야, 미안한데 오늘은 우리 집으로 와줬으면 좋겠어.”
“집이 어딘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건 좀 아닌 거 아냐?”
“모르겠어. 나 집에서 못 나갈 것 같아.”
“왜? 집 앞에 스토커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고… 부탁할게.”
“휴…. 알았어.”
솔직히, 도수가 생각해도 아무리 동갑이라지만 일로만 엮인 사이이니 만나는 빈도로 보면 어떻게 보면 직장 동료보다도 먼 사이인데, 집으로 오라는 것이 이상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종이를 들여다보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커피머신으로 커피를 투샷을 뽑아 훌쩍거렸다. 직장에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하던 행동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그로서는 딱히 담배 연기를 삼키지 않으면 거부감까지는 생기지 않았지만 당장 스트레스는 없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쓸 정도로 달디단 초콜릿이나 진하디 진한 커피는 스트레스를 가라앉혀 주었다.
영미는 영미대로 도수가 걱정스러웠다. 이해하기 힘든 내막이 있기는 해도 그가 토로한 이야기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까. 전업 작가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글이 전혀 써지지 않는다면 걱정이긴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정도라고 보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좋지 않았다. 집으로 오라는 것이 갑질로조차 여겨지지 않은 이유였다.
딩동.
벨이 울리고 도수는 거실 인터폰 화면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영미는 처음 와 보는 집이지만 가끔 친구들 집들이 때 가 본 아파트들과 그닥 다를 것이 없어 익숙하게 현관문을 닫고 중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틀 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술 마실래?”
“너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세상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데 우리 술 마시고 섹스할까?”
보통 때였으면 영미는 험한 말을 하고 뛰쳐나갔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도수는 뭔가 일을 저지르려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얼굴 표정으로는 만약 저 질문에 영미가 ‘그래’라고 대답하면 더욱더 혼돈에 빠질 것 같은 상태다.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자.”
영미가 소파에 앉으며 도수의 손을 잡고 당겼다. 도수는 얌전히 옆에 앉았다.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뭔가 놀란 일이 있었거나, 바닥까지 가라앉은 좌절을 맛보았다는 것인데, 그게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차원의 연장이라고 하기에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도수가 여전히 시선을 허공에 고정한 채로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마실 것 필요 없으면…”
“어, 필요 없어.”
“그럼, 얘기할게. 처음부터 다. 질문은 하지 말아 주고… 미안해.”
“미안하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얘기 다 접어 두고 나 부를 때 하고 싶던 얘기나 해 줘. 나도 그게 궁금해서 온 거긴 한데, 너 자신한테도 그게 제일 우선인 것 같다.”
“사실은, 종이와 대화한 게 아니었어.”
“응? 그때, 술 마시면서 한 이야기 말하는 거야? 스토리 떠올린 이야기?”
“맞아.”
“알아. 전부 비유였던 것 같았어.”
“아니, 비유가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종이 속의 사람들과 대화한 거였어.”
도수의 표정이 점점 확고하게 다 이야기하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단호해져 가는 것과 반대로 영미의 얼굴은 아리송하다는 표정이었다.
“사람이라니?”
“박제윤.”
“응? 박제윤? 핏빛 빌딩의 그 박제윤? 옥상에서 불장난하는?”
“맞아. 그 제윤 씨.”
“응, 그 주인공이 왜?”
“제윤 씨가 해준 이야기였어. 그 소설 내용은.”
“제윤 씨? 어디 있는데?”
“종이 안에 있었는데 이제는 소설 속에 있지.”
그리고 처음 그 현상이 나타났을 때, 그러니까 스토리가 생겨나기도 전에 목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도 긴가민가 하던 때에 나누었던 현실적이고도 철학적이었던 대화들을 모두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같은 연장선에서 다른 글들도 각각 사람들과 대화하며 쓴 것이라는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고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가서 새 A4 한 뭉치와 그동안 발표하지 않고 모아둔 손글씨로 가득한 종이들을 가져왔다. 영미가 하나씩 넘겨 보는 동안 그가 말했다.
“제목 밑에 있는 이름들이 내가 대화한 사람들 이름이야. 실제 사람도 아니고,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통화하듯 목소리만 들린 사람들이지. 제목은 그 사람이 처음부터 알고 있어서 나에게 대화하면서 이야기해 준 것도 있고, 나중에 내가 붙인 제목도 있었어.”
“그러니까, 이게 오리지널이고, 며칠에 걸쳐 여기에 이만큼 받아쓰기하듯이 쓴 글들을 편집해서 최종적으로 글을 완성했다는 거지?”
“맞아.”
“알겠어.”
“뭐가?”
“하려는 이야기의 배경은 알겠다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맞아, 중요한 건 문제지. 그는 생각했다. 소설의 화자들과 대화하게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그 대화가 끊긴 것이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으려고 많은 고민을 했다. 습관을 바꾼 게 있었는지,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뀐 곳이 있었는지, 틈틈이 다른 여러 책을 읽으며 소설을 쓰면서 내 문체가 영향을 받아 달라진 게 있었는지 면밀히 검토했지만 그 사이 그에게 변화가 생긴 건 없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책상 위에는 빈 A4 용지 한 장은 항상 펼쳐져 있었다. 영미를 집으로 부르기 전날 밤, 또다시 ‘문제가 뭘까’, 하며 하얀 종이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살짝 집중하게 되면서 순간적으로 종이 표면의 질감, 섬유의 얽힘이 보이는 듯하는 순간 뭔가 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아니, 누군가 말을 하려는 듯한 느낌은 있는데 그전과는 다른 종류의 느낌이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통은 종이 안에서 먼저 말을 하게 마련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흠, 흠”
도수는 목을 가다듬고 빈 종이를 향해 말했다.
“저기요…”
그때, 종이 속인지 허공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당신의 이름은 한도수… 가 맞지요?...”
도수는 순간, 박제윤을 떠올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 책상 앞을 벗어나 종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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