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꿈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p L May 26. 2024

침입자

나는 공항의 보안 담당 부서의 차장이다. 그러나 출입국이나 통관과는 관계가 없는 공항 자체 보안을 맡고 있다. 간혹 출입국 중에 탈출하는 외국인이 있을 때는 비상이 걸리기는 하지만 공항이라는 공간 내부가 민간인에게는 생소한 공간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크게 번지는 일은 없다. 갖가지 통로들과 통로를 지나는 길에 있는 용도에 대한 친절한 설명 따위 없는 수많은 문들, 에스컬레이터와 통풍구 외에는 모두 하얀 색인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듯한 디자인들 모두 불법적인 의도로 침입한 사람들을 방향감각과 거리감각 등으로 쉴 새 없이 공격한다. 내부에 돌아다니는 직원들이야 별 상관없다. 아무리 불친절하게 설계되었다고 해도 남의 건물인 것과 회사 건물인 것은 엄연히 다른 기준으로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내게 돈을 고 일을 시키는 기관이 내게 들어가서 일하라고 정해준 건물이 좀 불친절한 게 무슨 상관인가? 친절하게 바꾸는 대신 월급이 줄어드는 것보다는 현재 상태로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온통 하얀 색인 것도 상관없다. 하루 중 통로에서 보낼 시간은 몇십 분도 되지 않으니까. 아무리 정신적인 측면에서 감각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사무실 컴퓨터 속도가 통로 색깔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컴퓨터가 느려지면 바로 욕설을 하고 관련 부서에 전화를 하지만 통로에 있는 하얀 패널이 하나 빠져서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고 대놓고 위험해 보여도 그런 것을 감시하는 것이 본업인 안전부서 외에는 실제로 관리하는 시설부서에서조차 전혀 관심이 없다. 그 통로는 출근길 버스 같은 그런 거라서, 전날 술을 많이 마셨거나 해서 속이 안 좋은데 너무 길게 느껴질 때 외에는 전혀 중요할 일이 없다.
그날도 여기저기 CCTV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화면이 안 나오는 카메라번호 없이 잘 넘어 가는지 001번 화면에서 065번 화면까지 확인하고 출입증이 허가된 구역에만 잘 들어가 있는지 번호별로 녹색으로 표시되는 것을 보고는 일지를 적을 생각에 빠졌다. 모두 컴퓨터로 처리하는 이 와중에 그런 것들을 확인했다는 일지는 손으로 쓰고 결재까지 사인으로 받아야 한다. 순찰일지는 인트라넷에서 작성하는데 그 순찰일지를 확인했다는 사인은 종이에 하고 그 일지를 관리하고 있다는 목록도 종이로 만들어 손으로 결재해야 한다. 순찰일지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는데 카메라 확인한 결과에는 뭔가가 있다면 나중에 그 일지를 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순찰일지에 뭔가가 나오더라도 카메라 확인한 결과에 뭐가 있는지 나중에 그 일지를 꺼내서 그 날짜까지 넘겨 보아야 할 수 있다. 내가 담당자이지만 이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담당자는 그냥 보라는 대로 눈으로 보고 사인하라는 대로 손으로 그리면 그만이다.
카메라 번호만 한 번 더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자리 여직원이 "어?"하고 놀랐다. 나는 성의 없이 화면 왼쪽 위에 있는 카메라 번호만 보면서 화면을 다음으로 넘기며 "야, 놀라는 척 금지"하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여직원은 농담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차장님 35번에 사람 있어요."라고 했다. 35번이면 방음 회의실 가는 통로 쪽이다. "거기는 회의 없으면 못 가는 거 아니야? 회의 있어?" "오늘은 회의가 한 건도 없습니다." 또 비상인가. 다시 뒤로 가는 화살표를 눌러 카메라 번호를 되돌렸다. 'CA-통로그룹 6-35'. 하얀 통로 한가운데 하얀 양복을 입은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깡마른 외국인이 서 있다. 회의실에서 다시 걸어 나오는 모양새이다. "조금만 앞으로 돌려봐." 여직원이 화면의 시간을 거꾸로 돌렸다. 그 사람은 회의실로 간 다음 문 손잡이를 잡고 돌려 보고는 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저기에 지금 출입증 잡혀? 없으면 안 되는데?""잡힙니다. 어제 발급됐습니다.""어제 발급했는데 아직도 들고 다닌다고?""확인해 보겠습니다. 아, 사유가 어제, 내일, 모레 회의가 있습니다.""신분증 아직 우리가 가지고 있나?""네, 미코스 트리뷴트 씨입니다.""알았어 내가 가볼게."
통로로 가 보니 미코스 씨는 하얀 통로의 많은 하얀 문들 중에 그 통로로 처음 들어갈 때 자신이 사용한 문을 찾지 못해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테러를 의심할 수도 있었지만, 다른 곳도 아닌 그 통로는 보안검사를 통과하고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회의 날짜가 아닌 날 회의실을 찾아온 사유를 종이에 적고 사인을 하게 했다. 내일 사용할 발표 자료를 미리 가져왔다며 회의실 컴퓨터에 복사해 달라고 USB를 내밀었지만, 보안상 이런 것은 미리 관계자가 했거나 아니면 회의 당일 직접 하셔야 한다고 말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일은 크게 번지지 않았지만, 부장님께 보고했기 때문에 전체 교육을 한 번 받았다. 무엇보다 출입 관리 프로그램을 보완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번 같은 경우 날짜 범위를 지정해서 출입을 허가해서 생긴 문제였기 때문에, 회의 날짜를 하나하나 지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혹은 1일 단위로만 허가를 해야 한다 등의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결국은 정해진 일정이 있다면 모종의 이유로 그 날짜로 지정을 해주지 않을 수는 있어도 기능이 없어서 해줄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예산도 없는데 소프트웨어 업체는 이 프로그램 수정 하나로도 몇천만 원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가 소프트웨어를 개발 구매하겠다고 해 놓고 막상 납품 때가 되면 보안규정 핑계로 소스코드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판국이니 그 정도 달라고 하는 게 당연하기는 하다. 어찌 보면 소스코드를 다 받아 놓고서도 수정하려면 돈을 다시 주어야 하는 우리가 바보인지도 모르지만. 매우 부지런하신 미국 신사 한 분이 내게 많은 일을 시켜놓고 가셨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속에서 만난 나와 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