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거리 빵집이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유독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드문, 언제 가도 한가한 빵집이었다. 그 빵집의 주요 상품은 생크림과 과일을 올린 도넛. 여자는 도넛에 올린 과일 재료 접시를 보며 키위를 더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새파랗던 하늘을 자랑하던 가을이었다. 어느 날, 구름이 끼고 그 구름이 두꺼워지기 시작하더니 가랑비가 내렸다. 온 세상이 회색으로 어두죽죽했다. 간혹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리기도 하는 날이 되었다. 그런 날이면 빵집에 사람이 늘었다. 이리저리 드나드는 코트를 입은 사람들과 2층에 올라가서 밖을 내다보며 공부하는 사람들이 뒤얽혀 입구가 복잡했다. 빗줄기가 굵어졌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차분했다.
저녁이 되어 여자는 이제 키위를 썰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달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달달한 느낌이 드는 생크림이어서 단 맛이 강한 과일을 올리는 건 규칙에 어긋났다. 그렇지만 상큼한 맛도 나야 했기에 키위와 수박, 딸기가 보통 올라가는 과일이었다. 키위를 꺼내 씻고 껍질을 벗기는데 문이 열리며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아직 칼을 들기 전이라 어서 손을 앞치마에 닦고 다시 카운터로 갔다. 단발의 여학생이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커피 주세요."
"빵은 괜찮으세요?"
"네."
여자는 계산을 하고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여학생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여자가 커피를 다 내려서 주자 여학생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여자는 당연히 테이크아웃 잔에 달라거나 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여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시디플레이어였다.
"이거 틀어주세요."
여학생은 시디플레이어를 끈 후 시디를 꺼냈다. '위풍당당행진곡'이었다. 여자가 얼굴색이 갑자기 변했다.
"네..."
여학생은 아무 표정 없이 그대로 커피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여자는 손을 덜덜 떨며 키위를 마저 썰고 나서 벽에 있는 시디플레이어를 켰다.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던 음악이 멈추었다. 시디 장 아래에는 여러 가지 시디들이 있었다. 서른 장 남짓 되는 시디 중 위풍당당행진곡은 가장 오른쪽 끝에 있었다. 여자는 익숙하게 두 손가락으로 시디를 꺼내어 케이스를 열었다.
시디플레이어에 올려놓고 살짝 밀자 시디가 들어가고 잠시 후 음악이 흘러나왔다.
센 바람이 불면 우산이 뒤집어지고 온몸이 젖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우산을 쓰고는 했다. 하지만 그날부터는 강한 바람이 사람을 미는 그런 비바람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얇게 지나가는 바람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불었다. 사람들은 몸이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바람이 바뀌는 것이 공기와 기압의 작용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자는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분위기가 바뀌면 바람이 바뀐다. 비바람이 부는 날씨는 어둠의 세상이다. 구름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맑은 날의 공기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투명한 날씨이다. 어둠의 세상에서는 사람들조차 우산과 비옷이라는 두꺼운 장막을 한번 더 치게 된다. 그런 날의 분위기를 바꾸는 존재는 언제나 그런 존재를 대해야 하는 여자에게조차 버거운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