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립만 찾는 사람은 이성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민감한 사안이 터졌을 때, 소위 '중립기어 박는다'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긴 하는데 잘 안된다. 여러 가지 정보가 혼재한 시대이고 그것을 분별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진 세상에서 잘못된 입장을 표명했다가 후에 그런 말을 한 것을 빌미로 비판받고 싶지 않은 것 같다. 혹은 진짜 신중하게 사안에 접근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립기어 박아라'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오해하는 것은, '중립(기어)'조차 하나의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아침에 이불 박차고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엄밀한 의미에서 학교를 갈지 말지, 회사를 갈지 말지, 약속에 나갈지 말지도 선택이다). 여기서 중립은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의견을 암묵적으로,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이다. 소위 디폴트 메뉴는 '선택하지 않음' 혹은 맥락 바깥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뭐만 하면 중립기어부터 박고 보라는 사람들을 매우 의심하는데,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기보다는 '틀리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전전긍긍하는 수험생을 보는 것처럼 위태롭다.
최근 밝혀진 인지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끔 살짝 문항만 바꿔도 '중립' 혹은 '의견 없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무척 줄어들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봐도 정치적 중립과 '견해 없음'은 사회 전체를 보수적으로 끌고 가는 데 강하게 일조했다. 역사의 거대한 변곡점에서 열심히, 자기 삶을 잘 꾸려나간 사람들이 사회 전체를 나쁜 쪽으로 움직인 건 분명하다. (이것을 혹자는 '열심히 산 죄'라고 표현했다.) 꼭 "중립은 악에 대한 암묵적인 동조"라는 단테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중립은 현체제를 유지하는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다.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중립'은 반드시 어느 한쪽 의견에 강력히 힘을 실어준다. 유발 하라리도 식민지 시대의 영국 사례를 들며 지적했다. 대서양 노예무역 시대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골인 1천만 명의 삶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신경을 썼는데, 이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 사업에 돈을 내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이었다.
과연 오늘이라고 다를까? 더 하다. 빠르게 윤리가 판단되고, 선택의 중요성이 이처럼 강조되는 시대에서 끽하면 '중립기어 박아라'는 말을 그 어떤 성찰도 없이 타인에게 권하고 또 스스로 신념으로 삼는 사람은 비틀려 있다. 상황이 지나간 다음에 '다 보고 나서 결정하려는' 전체성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 인류의 수명이 100세가 아닌 1000세로 늘어나도 우리는 지극히 제한되고 파편적인 정보만 얻을 수 있을 뿐이고, 다 보고 나서 결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 보고서 판단하려 했을 땐 이미 때가 늦다. 이미 당사자는 '중립'을 표명하면서 대세를 지지한 셈이 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데도 '중립기어'를 무슨 종교처럼 받들고, 자신을 무슨 객관적이고 신중한 사람으로 포장하는 사람을 보면 안쓰럽다. 자기 선택이 훗날 틀린 것으로 판명되는 것이 무서워서 자기 삶을 맞는 답으로만 채워나가려는(일관성으로 가득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일관되게 살아가지 않으며, 외려 요즘 같은 시대에서 신념이 한결같은 사람은 대쪽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 무서운 소시오패스 안하무인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사회는 '초심을 지키자'는 희한한 구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갖고 있어서 이런 류의 성찰이 더욱 드물다. 꼭 이런 주장을 하면 표리부동한 정치인의 사례를 들먹이거나, 도덕을 내팽게쳐도 된다는 주장에 찬동하는 거냐는 희한한 반론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비윤리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다. 상황을 다 보고 나서 판단하는 게 옳다고 믿거나 자기 삶을 일관되게만 꾸리려는 태도가 병적인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 자체가 편집증적일뿐더러, 한 사람의 성장 가능성을 믿지 않는 태도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어쭙잖은 개똥철학이 무슨 진리처럼 거리를 떠도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타인에게 하고 다니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어릴 적 일기장을 보거나 과거 SNS의 자취를 살펴보거나 네이버뉴스 인터넷 댓글 기록을 확인하기를 바란다. 꽤 볼 만할 것이다.
사람은 한 시기에 고정돼 있는 존재가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면서 어제 했던 말을 이불킥하면서 오늘 내 행동을 조정한다. 그래서 이즈음의 사람들의 윤리적 요구가 높아진 것과, 병적으로 누군가 삶에서 일관성을 요구하는 것은 구분해야 봐야 한다. '중립'을 찾으면서 틀리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식으로 자기 인생을 일관되게 통일하려는 욕망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그냥 어디가 아픈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타인에게 도덕적 차렷자세를 요구하는 사람이 많아지며, 옆 사람과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갉아먹는 자존감 도둑놈이 넘쳐난다. 자기가 어제 했던 말을 고통스럽게 뒤집는 시행착오를 하면서 점을 찍어나가는 방법 외에 다르게 살아가는 방법이란 없다. 진짜 완벽주의와 무흠결은 완벽한 자폐에 다름 아니다.
타인의 삶이든 자신의 삶이든 동그라미로 채우려고 할 때, 외려 그 사회는 병든다. 틀린 의견을 내지 않으려고 비겁해지는 사람이 늘어나며, 그런 사회에서 '중립 기어'는 거의 신앙이다. 쉽게 말해, 다른 의견이나 실패에 대한 병적인 기피가 의견을 내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까지 칭송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틀린 의견을 가져보고 또 부끄러워하면서 지지부진한 일상을 사건의 영역으로 들어 올리고, 이때 사건을 머릿속에 깊이 각인한다. 이렇게 일상을 사건의 차원으로 들어 올리는 과정을 우리는 '배운다' 혹은 '성장한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대가리 꼿꼿이 세우고 자랑스럽게 중립기어를 박은 사람들이 가득한, 이 세련된 도회적 풍경을 비겁함으로 일동 발기한 풍경으로 본다. 그건 그냥 '무지'와 '견해 없음'이라 해야 한다. 아니, 견해가 없다는 솔직한 고백은 '중립기어 박아라'는 말보다 백배천배 낫다. 가장 나쁜 것이 견해도 없고, 특별히 알려는 의지도 없는 것 같은데 중립기어를 미덕처럼 칭송하는 인간이다. 그 점에서 '너나없이 초심을 권하는 사회'와 '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회'와 '중립기어만 권하는 사회'는 무척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
부디 간단해지자. 모르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아는 범위 내에서 얘기하면 된다. 외려 진짜 건강한 사람이라면 자기가 가진 제한적인 정보 내에서 분명하게 입장을 선택하고 말할 것 같다. 중립은 많은 경우 안일함과 유약함의 산물이다. 어떤 사람은 사안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중립기어만 박는 세태에 대한 알리바이는 결코 될 수 없다. 외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대해 고구마줄기처럼 엮여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더 단호하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맞다. 세상사 복잡하지 않은 일은 하나 없다. 하지만 그 말만큼 하나마나한 말이 없다. 그러므로, 분명함은 사실이 아니라 태도다. 한발한발 못을 치며 나가는 것이다. 후에 선택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면 물리면 되고, 물릴 수 없다면 스스로 책임지면 된다. 솔직히 턱 까놓고, 스스로 책임지기 싫고 틀릴 용기도 없으니까 중립기어 박는다고 말하는 거 아닌가? 보궐선거가 코앞인데 아직도 투표장 가지 않는 걸 자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길게 쓴다. 아마 그런 사람은 내리막길에서도 기어이 기어를 중립에 놓고 차에서 내릴 모양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하지 않고 권리와 선택을 운운한다고? 차라리 진공에서 숨을 쉴 수 있다고 하자. 시험기간만 되면 교육제도 비판하는 십대 학생도 아니고 대체 머리 굵은 어른들이 왜 선거철만 되면 정치적 중립에 대한 현학적인 뻘소리 하면서 자기 행동 변호하려는지 모르겠다. 솔직해야 할 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구원이라고 했다. 선거철이다. 선거하자. 겐또라도 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