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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러스씨 Mar 06. 2021

[5] 세대론이 온다

⏤ 이해와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오는 구별과 배제



무언가가 '온다'고 말하는 이들,

그들이 자리한 풍경에 대해서



'이해'란 말이 참 좋다. 그러나 좋은 말은 누구나 좋다는 걸 알아서, 종종 전혀 좋지 못한 내용을 변호하거나 호도할 때도 활용된다. 최근 조직 사회에서 '이해', '소통'과 같은 키워드가 강조되는 것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요즘 잊을만하면 이런저런 어른들이 나와서 무슨 청년 세대의 멘토 자처하는 모양새도 마찬가지다(재밌게도 그들은 대부분 대기업 출신 마케터다). 그들이 이해를 말하면서도 흔한 세대론으로 빠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녕 청년들을 이해하려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그들이 '90년생'이 온다고 했을 때(이제는 '2000년대생'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호명하는 90년생은 대체 어디 있을까? 한사코 청년을 외지인이나 손님처럼 '온다'고 별스럽게 말하는 이들이 깔고 앉은 자리는 어떤 풍경이며, 또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어떤 생김새를 가졌을까?

   여기에서 나는 '십진법에 묶인 구태의연한 세대론' 운운하는 비판은 잠시 접어둔 채, 메시지가 아닌 그 뒤에 가려진 메신저의 태도에 관해 말해보고 싶다. 메시지를 비판할 수 없어서 메신저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메시지가 그런 식으로 쉽게 약화되지도 않을 뿐더러 메시지와 메신저는 애초에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내가 지적하려는 바는 특정 세대를 매번 온다분석하는(해석하고 타게팅하는) 이들의 수사법에서 엿보이는 전제, 그 사고방식이다. 한국에서 반복되는 세대론에 내재한 한계이기도 하다.




오직 '온다'는 마케팅의 기획이 있는,

같이 '간다'는 공동의 계획은 부재한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활용형으로서, 그 사전적 정의가 발화자의 위치에 기준하고 있흔히 발화자가 집에서 손님을 기다릴 때 우리는 손님이 '온다'고 표현한다. 이렇듯 '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상정하며, 은연중에 자신을 '기준'에 둔 채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포즈를 보인다. 온다의 반댓말인 간다를 생각해보면 자명하다. 능동적인 움직임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받아들임의 표현에 가깝다. 물론 표현 자체는 옳고 그름이 없다. 하지만 세대론이라는 특수한 사안을 다룰 때, 나아가 '패기 넘치는'(=발칙한) 청년 세대를 다룰 때, 늘 기성의 언어가 '온다'고만 표현된다면 그것은 문제다. 

네 가지 뜻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사람', '기준'을 상정하고 있다. 스스로 이동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대상을 두고 '온다'고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다. 출처는 네이버 사전.


세대론에서 '온다'는 표현은 발화자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을 넘어서 그 권위를 방증한다. 전지점 시점을 상정한 채 만사를 굽어보면서 해설하는 사람들의 수사는 '온다'로 점철돼 있다. 그들은 늘 '미래'가, '위기'가, '기회'가, 심지어는 '사람'이나 '세대'조차 온다고 표현한다. 움직이지 않고 안전한 자리를 엉덩이로 깔고 앉은 채, 호혜적으로 시선을 주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과장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까? 글쎄. 포털사이트에 들어가서 세대론과 연관된 청년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뉴스 기사, 신문 사설란, 심지어 세대론을 다루는 베스트셀러에서도 청년들은 '젊음의 패기', '통통 튀는', '발칙한' 따위의 구태의연하고 시혜적인 수사로 소비되고 있다. 

미국 1달러 지폐에도 그려져 있다는 일루나미티 표식. 모든 흑막론은 배후에서 만사에 관여하는 전지적인 시점 하나를 상정한다. 이 시선은 움직이지 않는다.

   최근 한 대기업 마케터 출신이 쓴 책이 베스트셀러로서 주목받은 배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저자는 책에서 요즘 청년들의 발칙한 몇몇 군상을 이해할 필요성을 언급하며 크게 주목 받았지만, 그 책이 과연 청년 세대를 이해하는 데 진정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책 이후에 MZ 담론이 촉발되기는 했지만, 그러한 담론에 응답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청년들이 아니었다. 책에서 묘사하는 추상적인 '요즘 애들'의 군상에 호응한 이들은 관리자 급에 해당하는 40대였다. 이는 알라딘 서점에 들어가서 해당 책을 구매한 사람들의 나이별 분포 추이만 봐도 알 수 있던, 불편한 진실이다. 청년 세대의 이해를 말하는 책이 정작 현실의 청년에서 동떨어져 있는 이런 일들은 왜 반복될까? 

   사회학자 엄기호는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2012)라는 책에서 청년들을 이해하려는 어른들의 태도를 지적한다. 젊은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만 있으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자 엄기호는 제대로 된 정보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지배와 통제의 욕망일 뿐이라고 말한다. 진정 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보를 넘어선 청년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지식이며, 근본적으로 청년 세대와 기성 세대가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다. 나아가, 저자는 기성 세대가 청년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궁금해하면서도 그들을 대하는 본인들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청년들의 감수성과 코드를 궁금해하는 자신들의 감수성과 코드는 성찰하지 않으니, 자연히 청년들을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함께 가자고 말하는 유의 언어와 기획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려 10년 전에 나온 책임을 감안하면 뼈아픈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외부 세계에서 당도한 별종이 아닌

내부에서 자라온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서양인들의 문어 혐오(?)는 그들이 초월적인 외계 생명체를 묘사하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기 내부의 불안과 공포를 외부에서 보고자 한다

오랫동안 대중 매체에서 외계인은 침략자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내면이 투영된 결과임을 안다. 인류 역사는 미지를 탐구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대륙을 침략하고 원주민을 수탈한 이야기로 점철돼 있는데, 대중 매체에는 그런 역사에 내재한 불안과 초조함이 투사돼 있다는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에서부터 스티븐 스필버그의 E.T에 이르기까지, 상상 속의 외계인들은 이방인이나 침략자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모습을 찬찬히 뜯어 보면 거기에는 당대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동물의 조합이 보인다. 그들은 우리 안에 도사린 불안과 공포의 불분명한 그림자인 것이다. 

   청년들을 한사코 '온다'고 표현하는 세대론에서도 비슷한 유의 불안과 공포가 읽힌다. 기성 세대는 젊음과 패기로 무장한 채 자기 요구를 당당히 말하는 청년 세대를 보면서, 자신들이 이제껏 이뤄온 조직의 규율과 전통적 합의가 와해될 거라는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 기성 세대에게 청년들이 매번 온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다 이런 때문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외부에서 오지 않았다. 온다고 말하기 이전부터 청년들은 공동체의 일부였다. 비록 성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경제 활동의 주축을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기성 세대가 만들어놓은 제도 안에서 보호받으며 길러진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오는 청년들을 이해할 도리는 없다. 다만 함께할 기획 안에서 청년들을 이해하려는 자신들을 성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기획 없이 이해를 말한다면, 그것은 기성 세대가 청년들을 '조직의 불확실성'으로 치부한 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해가 오해가 될 때

이해되지 않는 존재와 살아가기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해를 말하고자 한다. 기성 세대들이 세대론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간편한 '앎'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그 '앎'이 지향하는 바가 현실의 참모습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 이해로서 '앎'은 단편적일 뿐 아니라 오해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조금 과격하게 말해서 문제의 핵심은 '이해'가 아니다. 어느 세대든 자신의 부모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조차 온전히 이해되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가족이연인이다. 자기 인생의 의미와 소명을 모두 이해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때때로 무언가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은 욕심일 있다. 상대를 좁은 '앎' 안에 욱여넣고, 사실상 통제하고 관리하고 있을 뿐이면서 상대를 "이해했다"고 안심하기 위한 말은 아닌지 의심해볼 일이다. 10전 쯤인가, 비슷하게 청년 세대를 이해한다고 말했던 이가 주장했던 카피가 "아프니까 청춘이다"였다. 황당해서 잊히지도 않는 희대의 카피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늘의 우리는 무수한 번안을 본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내가 정말 존경하는 어른들은 함부로 이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분들은 아니었다. 이해가 얼마나 어렵고 또 때론 불가능한 것인지 알기 때문에 함부로 이해한다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이해는 도달가능한 종착역이 있지 않고, 다만 과정 자체가 목적인 행위로 언제나 저 너머에 놓여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청년 세대에 섣부르게 '이해'를 말하려는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청년들은 이해받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게 아니다. 그보다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고통받는 것이다. 이해란 문제를 해결할 해결책조차 못되는 셈이다. 외려 이해가 하나의 의무가 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무엇'이 될 때, 그 이해란 통제와 지배의 다른 이름이 된다. 좋은 어른들이라면 이해할 수 없음을 차라리 쿨하게 인정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같이 살아갈 수 있고, 또 같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어른들은 무척 드물다. 내 보기엔, 뭐만 하면 어쭙잖은 세대론을 내세워서 자기 통찰력을 뽐내기 바쁘다. 그러나 통찰은 마법이 아니고, 우리가 이모양이꼴로 살아가는 건 뭐 대단한 통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보통 '난 널 이해한다'라고 말하며 접근하는 사람은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불우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몇 개의 데이터를 정량적으로 분석하고, 협소한 세대론으로 복잡다단한 인간들을 구획하고,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호도하는 식으로 젊은 사람들의 소비 패턴이나 문화 몇 개를 표본 삼아 들여다보았다고 '이해' 들먹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이해는 오해에 다름 아니다. 한평생 나를 데리고 살아도 나를 모른다고 말하는 게 제대로 된 이해의 모습이 아닐까? 막말로, 이 글조차 온전히 이해되지 않아도 된다. 청년세대가 온다고 말하지 말고 그들을 만났다고 하는 세대론 책이 있다면 펼쳐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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