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 오로론라인~쇼산베츠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곯아떨어졌는지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텐트 입구를 열자 햇살이 쨍쨍 들이닥쳤다. 큰일났다, 곧 사람들이 올 텐데. 사람들이 전망대에 올라오기 전에 얼른 텐트와 짐을 정리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결로로 젖은 텐트를 대충 수건으로 닦아내고 볕에 말리면서 동시에 짐을 후다닥 정리했다. 옥상에서 주위를 둘러보자, 어제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 아래에 끝없는 목초지와 바다, 그리고 망부석처럼 어제와 다름없이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는 리시리 산의 모습이었다.
곰이 냄새를 맡을까 봐서라는 어이없는 상상력으로 먹지 못한 어제 사 온 빵과 우유를 아침으로 먹었다. 한국에서 먹던 우유와 다르게 굉장히 고소하고 진한 맛이다. 뭘 소에게 먹여서 키우길래 일본 우유는 이렇게 맛있지?
전망대를 빠져나와 출발하자마자 정말 지평선에 닿아 있는 것처럼 멀어지는 끝이 안 보이는 직선도로가 펼쳐졌다. 아, 여기가 오로론 라인이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라고 말하는 거구나. 출발도 하기 전에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일본이라기보다는 스위스와 같은 유럽에 있는 드넓은 초원 한복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도로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끝없는 홋카이도 내륙의 목초지와 숲, 그리고 오른쪽에는 끝없는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지고 그 한가운데 묵묵히 우뚝 솟아있는 리시리 산이 보였다.
‘진짜 미쳤다…’
미쳤다,라는 속된 비속어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경치였다. '미쳤다'라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실제로 되뇌었는지 모른다. 1시간 동안 페달을 밟아도, 몇 십 킬로에 걸쳐서 풍경이 그대로였다. 잠시 도로변에 주저앉아 사진을 찍었다. 다시 페달을 밟다가 또 풍경을 찍는 것을 몇 번씩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간간히 차들과 바이크들도 나를 지나쳐갔다. 나와는 반대 방향이었지만 자전거를 타는 라이더도 몇몇 보였다. 바이크에 탄 한 명이 손을 흔들어 주길래 나도 반갑게 인사했다. 모두 광활한 오로론 라인 위에서, 다 같은 한 마음으로 풍경을 즐기며 행복한 질주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년시절부터 내가 최고로 사랑하는 밴드, 라르크 앙 시엘의 <Driver’s High>을 들으면서 달렸다. '거리를 앞질러서 이 세상의 끝까지, 부딪혀서 함께 죽어버리자…' 그 가사가 이리도 어울리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이런 절경을 바라보면서 마지막을 맞이한다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죽음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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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다음 편의점이 있는 테시오라는 마을까지는 장장 50km라는 거리를 달려야 하는데, 수중에 먹을 게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물조차 없었다. 마을이 나오기 전까지 지도에는 단 하나의 건물조차도 표시되지 않았다. 아까 먹었던 왓카나이에서 산 빵과 우유가 전부였던 것이다.
자전거를 타면 배고프지 않아도 20km마다 무조건 뭘 먹어라,라는 조언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데… 갈증이 나는 상태에서 1시간 동안 달리며, 자판기 하나라도 보이길 빌었다. 하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사용하지 않는 듯한 버려진 건물에 자판기조차도 볼 수 없었다.
점점 페달질은 느려지고 피로감이 배로 늘어났다. 자전거를 타면서 처음 느꼈던 것은 극심한 피로감 뒤에는 잠이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도 신기하게 졸리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추운 설원이나 불모지를 걸을 때, 정신을 잃어가는 동료의 뺨을 때리며 정신 차려,라고 말하는 장면이 연출이 아니었구나. 극도의 피로와 졸림에 자전거를 세운 채 그냥 도로변에 드러누워버렸다. 눕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10분 정도 눈을 감고 있다가 일어나니 몸이 훨씬 나아지는 것을 느꼈지만, 다시 자전거를 타면 10분 만에 에너지가 고갈됨을 느꼈다.
결국 50km를 가는 데 장장 4시간이 걸려 테시오에 도착했다. 편의점이 저 멀리 보이자마자 나는 속으로 환희를 질렀다. 내팽개치듯 자전거를 주차장에 세우고 편의점에 들어가 먹을 것들을 골랐다. 컵라면, 빵, 닭튀김, 콜라, 초코우유... 걸신들린 것 마냥 음식을 먹어치웠다. 편의점이란 존재가 이렇게 고마울 줄은 몰랐다. 홋카이도 종주 내내 세이코마트에게 신세를 졌다. 마트보다 비싸서 불평했던 편의점의 존재의 이유를 그때서야 깨달은 것이다. 어떤 외진 곳이더라도, 나타나서 라이더를 도와주는 존재…
테시오부터는 마을이 많은 편이어서 아까처럼 보급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테시오부터는 아까와 같은 눈부신 대자연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검색을 해 보면 왓카나이에서부터 저 아래에 있는 오타루까지 오로론라인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사실상 내가 본 영화 같은 오로론라인의 풍경은 왓카나이에서 테시오까지였다.
잠시 지나가던 길에 왼편 목초지에는 간간히 풀을 뜯어먹는 젖소들이 보였다. 너네가 그 유명한 홋카이도 우유의 원산지구나(일본에서도 가장 홋카이도 우유가 유명하다). 이런 드넓은 자연이 펼쳐진 곳에서 자유롭게 자란 소들이 만든 우유라면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지.
어느새 해가 점점 저물어갔다. 오늘 오로론라인에서의 소위 ‘봉크’로 인해 늦어지는 바람에 목표했던 루모이까지는 갈 수 없었다. 차선책으로 중간에 있던 쇼산베츠라는 마을에 있는 온천호텔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쇼산베츠에는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가 없었기 때문이다. 숙박비는 6800엔… 이틀 만에 돈도 아껴야 할 주제에 호화스러운 호텔이라니. 그렇다고 샤워도 하지 못한 채 이틀 연속 땀범벅으로 또 캠핑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호텔에 체크인하기 전에 근처에 있던 쇼산베츠무라라는 유명한 바다 위의 토리이를 보러 갔다. 석양 풍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또 운이 좋게도 석양이 지기 직전에 맞춰서 도착했다. 이미 토리이 근처에는 여러 일본 사람들이 대포카메라 등을 삼각대에 설치하고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체로 나이가 꽤 많은 어르신들이라는 점이 신기했다. 저렇게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직업이 사진가는 아니실 테니까. 어제 별을 찍으러 왔던 분도 그렇고, 일본은 다들 사진이라는 취미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해가 지는 타이밍에 맞추어 열심히 휴대폰으로 토리이와 바다를 찍었다. 귀신같이 해가 지자마자 모두 철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온천호텔로 향했다. 온천호텔이라 하면 온천을 이용할 수 있는 호텔인데, 사실 말이 온천이지 한국의 목욕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목욕탕이 달린 호텔. 나의 방은 트윈베드였는데 비싼 곳에 머무른다는 생각에 더 속이 상했다.
타투가 있어서 걱정했지만 다행히 온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 체크인과 온천 안내를 도와주었던 직원에게 “일본에 유학하신 적 있으신가요? 일본어 정말 잘하시네요.”라는 칭찬을 들어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다.
온천에서 뜨끈하게 몸도 녹이니 장거리 라이딩으로 천근만근이었던 근육들이 풀리는 기분이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풀썩 드러눕자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이미 온데간데 사라져 있었다. 그냥 너무 행복했다.
TV를 틀어놓자 흘러나오는 일본 예능 소리. 캠핑에서는 내지 못했던 일본 여행 분위기를 내본다. 어제 캠핑에서는 여행기를 쓸 수가 없었기에, 호텔에서 사진들과 일기를 정리했다.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자 군대 후임이었던 성윤이의 반가운 전화가 왔다.
이틀밖에 타지 않았는데도 햇살에 탄 다리에는 선명한 라인이 생겼다. 내일은 어디까지 가야 할까? 호텔에서 잤으니 내일도 돈을 아끼기 위해 캠핑을 해야겠다. 곰은 없겠지? 차가 많이 다니는 국도면 괜찮지 않을까? 무료 캠핑장을 열심히 알아보다가 오늘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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