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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Jan 20. 2024

홋카이도에서의 두번째 야외취침

3일차 : 쇼산베츠~호쿠류조

  기절한 듯이 자다가 오전 8시가 되어서 겨우 일어났다. 호텔 같은 곳에서 자게 되면 오히려 너무 편해서 일찍 일어나기가 더 힘든 느낌이다. 좋은 시설을 두고 일찍 떠나기도 돈이 아까워서, 미적거리다가 결국 늦게 출발하고야 말았다.

  체크아웃 후 어저께 보았던 콘피라 신사를 한 번 더 보러 바닷가로 향했다. 일몰 때와는 달리 아침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출발한 뒤에 어제 오로론라인에서 얻은 교훈 덕분에, 가장 먼저 편의점이 보이자마자 들어가서 한껏 컵라면과 빵 등을 위장에 때려 넣듯이 먹었다. 배가 고프건 말건 자기 자신의 기분은 일단 뒷전으로 미뤄둬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소시킬 몸의 에너지다.

  쇼산베츠에서 가까운 하보로조(羽幌町)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조는 한자로 정(町)으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읍과 비슷한 개념이므로 굳이 로컬라이징하자면 하보로읍…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보로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으레 여러 도시나 마을을 지나다 보면 보이는 흔한 선전이 적혀 있다. 그리고 3m는 될 법한 커다란 펭귄상이 보였는데, 하보로에는 펭귄도 사는 건가? 어제 지나온 길 중에는 겨울철에 물개도 볼 수 있는 곳도 있다고 하니 뭔가 미지의 홋카이도라면 펭귄이 산다는 것도 말이 될 것 같았다.

  하보로에 오던 도중에 짐받이 쪽에서 자꾸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보니 나사 하나가 헐거워져서 빠진 건지 사라져 있었다. 하보로에서 자전거를 검색하자 다행히 가게 하나가 지도에 보였다. 찾아가서 나사가 빠졌는데 고치러 왔다고 말했다. 간단한 정비다 보니 수리비는 얼마냐 묻자, 잠시 고민하는 듯 한 표정의 주인은 200엔만 내게 달라고 하셨다.

  “저, 혹시… 그 펭귄 비슷한 새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라고 궁금해서 내가 묻자,

  “아, 오로론조요? 여기선 못 보고 근처에 섬으로 배를 타고 가야 볼 수 있어요.”

  그렇게 아쉽게 새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나는 미련 없이 하보로를 지나가기로 했다. 그나마 마을을 벗어나는 어귀에서 한 고등학교를 보고 지나갔다. 알 사람은 아는 유명한 일본 만화 <너에게 닿기를>의 배경이 된 곳으로, 주인공인 카제하야와 사와코가 다니는 그 고등학교였다. 오래전에 본 애니메이션이라 별 감흥은 없었지만, 한국인 중 몇 명이 정말 먼 이 시골까지 <너에게 닿기를> 성지순례를 올 수 있을까,라는 의미 정도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렸다.  

  다시 국도를 달리던 도중 휴게소에 섬뜩한 불곰 동상이 보인다. 선거에 출마하는 국회의원처럼 가슴팍에 두른 노란 띠에는 교통안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welcome to tomamae. 어미곰과 아기곰이 귀엽게 만화로 그려진 표지판도 있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동물 재해 사건으로 꼽히는 산케베츠 불곰 사건이 벌어진 곳이 바로 이 동네였다. 그런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인데 불곰을 귀엽게 캐릭터화한 모습을 보면 참 아이러니한 느낌이 든다.



  토마마에부터 루모이까지는 정말 또 한 번 쭉 뻗은 시원시원한 국도가 펼쳐지는데, 사실 날씨가 흐린 탓에 아쉽게도 풍경이 마음을 움직이진 않았다. 그저 저 멀리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해안선 끝 도시가 루모이인가, 저기까지 가면 되나 하고 페달을 연신 밟을 뿐이었다.



  루모이에서 삿포로로 가는 길은 해안선을 따라가는 것과 내륙으로 들어가는 것 두 가지 루트가 있는데, 바다 쪽은 마땅히 숙소가 있을 만한 마을이나 도시도 안 보여서 내륙 쪽으로 결정했다. 루모이에서는 드러그스토어에 들러서 핫팩 정도만 구입했다. 어제 호텔에서 잔 탓에 돈을 아끼기 위해 오늘 다시 캠핑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루모이를 빠져나가 산간의 국도로 들어선다. 정말 거짓말처럼 시내에서 조금만 벗어나자 산으로 향하는 길에 ‘곰 출몰주의’ 안내문이 보였다. 뉴스나 인터넷에서만 보던 일본 곰 출몰이 이곳에서는 현실이구나. 그런 도로로 들어가야 하는 나에게도 이제 그 일이 남일이 아니었다.



   곰을 쫓는다는 방울은 없었지만 곰이 라디오 소리를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곰을 쫓을 요령으로 태블릿을 꺼내 노래를 켜고 달리는 것뿐이었다. 간혹 달리던 도중 정신나간 사람처럼 "아아악!"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달렸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같았지만 곰은 멀리서도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미리 소리를 내야 사라진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전방 주행보다 양측에 보이는 울창한 숲에 온 신경이 쏠린 채 달렸다. 다행히 차량이 자주 오고 갔다. 쌩쌩 지나가는 위험한 차들이 이렇게 고마울 수 있다니. 적막 속에서 자전거 홀로 달리는 것보다 옆에 차량들이 지나가는 게 오히려 안전했다. 그래도 가끔 1분 이상 차량이 지나가지 않을 때에는 수시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라이딩했다. 다행히 20여 km의 산지를 통과하자, 넓은 논밭의 시골 풍경이 펼쳐지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오늘 알아봐 둔 캠핑장은 이곳 근처에 위치한 무료 캠핑장이었다.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지만, 점점 해가 진다. 해 질 녘엔 10분만 시간이 흘러도 시야의 조도가 롤러코스터 하강하듯 급격하게 변화한다. 편의점에서 5분만 먹을 저녁거리를 사고 나와도 짙어지는 안개처럼 어둠이 깔린다. 캠핑장은 정말 외진 곳에 있었다. 도착하기 5분 전만 해도 공포에 질릴 만큼 건물도 불빛이 없는 길을 달렸다. 여기에 캠핑장이 있다고? 갔다가 죽는 거 아니야? 스릴러 영화에서 살해된 시체를 싣고 올법한 코스다. 도착한 곳은 낮은 산 쪽에 위치한 한적한 공원이었다. 간간이 보이는 나트륨등으로 노랗게 밝혀져 있던 이 외딴 공원에서,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다른 텐트가 2개가 보였다는 것이었다. 나도 이런 곳에 왔지만, 나 말고도 이런 외진 곳에서 정말 캠핑하는 사람이 있긴 하구나...

  무엇보다 여기를 택한 이유는 휴게실 건물이 있어서였다. 공원 안에 있는 산장 같은 건물 내부에서 텐트를 치고 자는 모습을 구글 리뷰에서 보았다. 무료로 실내에서 잘 수 있겠다 싶어서 왔는데…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불을 켜고 들어가자 정말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음침함이 감돌았다. 알 수 없는 흉흉한 기운이 느껴져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바로 불을 끄고 나와 공원에 텐트를 치자고 결정했다.

  자전거에 있던 전조등을 나무에 매달고 불빛에 의지해서 어두운 나무 아래의 잔디 위에 텐트를 쳤다. 그래도 한번 텐트를 쳐 봤다고 2번째인 이번에는 능숙하게 텐트를 쳤다. 텐트를 치는 와중에 한 텐트에 있던 사람이 내게로 왔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였는데 내게 “휴게소에서 자도 돼요.”라고 말했다. 자려고 가봤는데 너무 무서워서 그냥 텐트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나왔다,라고 대답하니 그렇군요, 허허, 사람 좋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 사람은 자신의 텐트로 유유히 돌아갔다.  

  샤워를 할 수 있는 장소도 없었지만, 바깥에 있던 개수대에서 어차피 사람도 없고 어두우니 최대한 씻을 수 있는 곳까지 씻자 해서 머리도 감고 팔다리까지 모두 씻었다. 멀리서 공원에서 씻고 있는 나를 관조할 수 있었다면 정말 애처로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공원 잔디에는 굉장히 뛰어다니는 벌레들이 많았다. 벌레들이 뛰어다니며 떨어진 나뭇잎이나 낙엽을 밟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곤 했다. 그 소리가 꼭 인기척 같아서, 텐트 안에서도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였다. 숲속에서는 간간이 알 수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아마 사슴이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위가 밀려온다. 사 온 핫팩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역시 핫팩은 군대 핫팩이 최고다. 숙박비를 아끼는 것엔 정말 큰 대가가 따른다. 예전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서, 그렇게 야외취침에 연예인들이 치를 떠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만 같다. 밖에서 자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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