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4일 차 : 호쿠류~삿포로
으슬으슬해진 몸과 함께 잠에서 깨었다. 정신은 깼지만 라이딩으로 너덜너덜해진 다리는 덜 깬 기분이었다. 가까스로 텐트 입구의 지퍼를 열고 엉거주춤 밖으로 기어 나오자, 귀신이 나올 것만 같던 산장과 사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어제의 음침한 캠핑장의 모습은 초록빛의 평화로운 동네 뒷동산 공원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간단히 세면을 하고 출발 준비를 위해 텐트를 접고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한 중년의 남성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떠나는 거야? 어디서 어디로 여행 중이야?”
나는 으레 말하던 것처럼 일본 종주를 하고 있다고 답하며 쑥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근데… 혹시 공원 관리자 분이신가요…?”
“기억 안 나? 어제 왔을 때 우리 이야기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내가 어젯밤 이곳에 도착해서 텐트를 끙끙대며 치고 있을 때 말을 걸었던 남성이었다. 자기는 바이크로 홋카이도 일주를 하러 왔는데, 오늘 배를 타고 야마가타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텐트 옆에 바이크 한 대가 보였다.
“여행 동안 조심해서 잘 가게. 그리고 일본어 진짜 잘하는구먼.”
사실 몇 마디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하하하, 하고 웃어넘겼는데. 뿌듯했지만 동시에 양심이 찔리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130킬로 떨어진 삿포로였다. 멀지만 그냥 얼른 도시에 가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3일 내내 하루에 100킬로도 타지 못했는데 130킬로를 탈 수 있을까? 홋카이도는 정말 넓다. 한국 사람들이 홋카이도에 대해 가장 흔히 착각하는 사실이 있다면 바로 크기일 것이다. 홋카이도는 대한민국 남한과 거의 같은 크기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자전거로 4일 만에 갔는데, 이번엔 4일째에 겨우 홋카이도의 절반을 달려서 삿포로 근처에 온 것이었다.
어제 이후로 더 이상 산길은 나오지 않았다. 근처 도시인 다키가와까지는 쭉 논밭이 펼쳐진 시골 풍경의 연속이었다. 사실상 공복 상태로 아침에 20킬로를 달린 탓에, 다키가와에 도착했을 때에는 너무 배가 고파 맛집이고 뭐고 그냥 제일 먼저 보이는 아무 가게에 뛰어 들어갔다. 카츠야라는 가츠동을 파는 가게였는데, 알고 보니 그냥 일본 전역에 흔하게 있는 프랜차이즈 가게였다. 아무렴 어때. 이제 일본에 한 달 이상은 있을 텐데 맛집 대신 흔한 프랜차이즈에 가는 것 정도야.
가끔 사람들이 자전거를 그렇게 타면 뭐든 맛있지,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느끼기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자전거를 타고 지친 상태에서 음식을 먹으면 모든 음식이 맛있는 게 아니라 미각의 양극화가 발생해 버린다. 맛있는 음식은 더 맛있게 느껴지고 맛없는 음식은 더더욱 맛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친 몸에게 맛없는 음식을 주면 ‘이거라도 먹어야지.’가 아니라 ‘힘들어 죽겠는데 이딴 음식을 넣어?’라고 몸이 거칠게 항변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다.
다키가와에서부터 더 이상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끝없는 교외지 풍경이 이어졌다. 일본의 교외 풍경은, 한자 간판들만 가리면 영락없는 한국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익숙한 빨간색과 노란색의 보도블록. 한국 풍경에서 아파트만 지우면 바로 일본 풍경인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참 다르면서도 많이 닮아있었다.
이런 국도를 달리는 것은 꽤 지루한 일이지만, 길은 뻥뻥 뚫려있고 오르막도 없어서 오로지 달리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오늘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삿포로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페달을 밟았다. 일본이 한국보다 위치가 동쪽이어서 그런지 해가 빨리 지는 건 둘째 치고, 노을 이후 어스름이 깔린 뒤부터 완전히 어두워지기까지의 시간의 ‘틈’이 한국보다 체감상 훨씬 짧은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그 시간에 햇빛 걱정도 없고 선선해서 산책하기 좋아했지만, 일본에서 라이딩을 할 때에는 어둠이 나를 죄어오는 시간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삿포로로 향하는 길에는 크게 외진 곳도 없었고, 차량 통행이 많은 국도가 대부분이다 보니 어두워진 뒤에도 달릴 만했다. 삿포로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차량도 많아지고 길도 밝아졌다. 지평선 부근에 보이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무수히 많은 빨갛고 노란 별빛들이, 삿포로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도심지에 들어서자 5분마다 라이딩을 멈춰야 할 정도로, 잦은 횡단보도와 신호를 기다리는 일이 잦아졌다. 점점 층고가 높아지는 빌딩 숲을 지나 멀리 형형색색 빛을 내는 타워 하나가 보였다. 삿포로의 중심가에 위치한 유명한 TV타워였다. 드디어 삿포로에 왔다! 야생의 홋카이도에서 안전한 도심지로 왔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긴 여정의 초반이었지만 첫 미션을 성공적으로 마친 듯한 성취감이 들었다. 특히 삿포로는 첫 방문이라 더욱 기대가 컸다. 삿포로 하면 뭐가 있을까? 삿포로 맥주, 징기즈칸, 수프카레, 눈 축제… 눈이 오는 겨울이 아니었기에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가을 삿포로의 매력을 찾으러 다닐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삿포로에서는 3일 동안 머무를 예정이었기에 호텔이 아닌 값싼 게스트하우스로 예약을 했다. “자전거는 혹시 어디다 둘 수 있을까요?”라고 카운터에 묻자, 점원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숙소 내부에는 둘 장소가 없고 바깥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일본 유료 자전거 주차장에 주차를 해본 적도 없거니와 이틀 뒤에 비 예보도 있어서 자전거가 홀딱 젖을 텐데… 어떻게든 대안을 짜내던 도중 캐링백에 자전거를 넣어서 방에 보관하면 안 되겠냐고 점원에게 애원하듯 물었다.
점원은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허락해 주었다. 연신 고맙다고 인사한 후, 캐링백을 꺼내서 자전거를 넣기 시작했다. 속속 체크인을 하러 들어오는 투숙객들이 나를 스쳐 지나며 흘긋흘긋 쳐다보는 듯해서 부끄러웠다. 바퀴도 분리하고, 짐도 분리해야 하고… 어찌어찌 자전거를 거의 반쯤 넣은 상태로 배정받은 방으로 끙끙대며 들고 가서 겨우 안치했다. 자전거 여행이란 매 순간이 전쟁이다.
캠핑을 해서 어제 샤워까지 못한 상태에서, 가장 긴 130킬로를 달린 후 샤워를 하자 온몸의 노고가 씻겨져 내려가는 듯했다. 벙커 침대의 하얀 이불에 몸을 내던지자 그대로 졸도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삿포로까지 왔는데, 그냥 이렇게 밤을 아깝게 날려버릴 수는 없지… 저녁이라도 삿포로 음식을 먹자라는 생각에 겨우 몸을 이끌고 시내로 걸어 나왔다.
삿포로의 번화가인 스스키노 거리는 온통 퇴근 후 한 잔 걸친 듯한 직장인 혹은 젊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작은 시골 마을들만 지나며 너그럽게 나에게 말을 걸던 다정한 일본인의 목소리만 듣다가, 이런 대도심의 술에 잔뜩 취한 일본어를 들으니 조금 겁이 났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스미레’라는 라멘 가게에 왔다. 30여 분을 기다려 입장한 끝에 주문한 미소라멘이 뒤따라 나왔다. 특별히 튀는 맛은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된장의 풍미와 국물, 면이 조화를 이루는, 한마디로 정말 치우침 없는 밸런스가 일품인 맛이었다. 밸런스가 너무 완벽한 나머지 어떤 맛이라는 묘사가 어려운 맛이다. 한 마디로 그냥 맛있다.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이틀 동안 삿포로에 머물며 체력을 회복할 예정이었다. 이틀 뒤 적당히 이동할 코스를 정하고, 지나가는 길목에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유명한 장소들을 찾아 구글 지도 속을 배회하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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