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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Jan 22. 2024

삿포로로 가는 130km의 길에서

일본종주 4일차 : 호쿠류~삿포로


  핫팩에 의지해 보았지만 역시나 캠핑은 너무 추웠다. 으슬으슬해진 몸을 이끌고 일어났지만 라이딩으로 너덜너덜해진 다리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까스로 텐트 입구의 지퍼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귀신이 나올 것만 같던 산장, 사슴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음침한 캠프장의 모습은 영락없이 초록빛의 평화로운 동네의 뒷동산 공원이었다. 



  간단히 세면을 하고 출발 준비를 위해 텐트를 접고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이제 떠나는 거야? 어디서 어디로 여행 중이야?”

  어떤 중년의 남성이 내게 걸어오면서 말을 걸었다. 나는 으레 말하던 것처럼 일본 종주를 하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쑥스러움을 곁들여서 대답했다. 멋지구먼, 하고 역시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근데… 혹시 공원 관리자 분이신지…”라고 묻자,

  “기억 안 나는가? 어제 왔을 때 우리 이야기했었는데.”

  알고 보니 어제 내가 텐트를 치고 있을 때 말을 걸어주신 분이셨다. 자기는 바이크로 홋카이도 여행을 왔는데, 오늘 배를 타고 야마가타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텐트 옆에 바이크 한 대가 보였다. 

  “여행 동안 조심해서 잘 가게. 그리고 일본어 진짜 잘하는구먼.”

  사실 몇 마디는 알아듣지도 못하고 하하, 하고 웃어넘겼는데. 뿌듯했지만 동시에 양심이 찔리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어서 텐트를 마저 정리했다. 자전거에 매다는 방수백에 에어매트가 끝까지 집어넣어지지가 않아서 다시 꺼내서 접었다. “아, 왜 이렇게 안 들어가…” 또 들어가지 않는다. 종주는 정신력 싸움인데 아침부터 고작 에어매트 때문에 인내심을 모두 소모해버리고 말았다. 욕지거리를 몇 번 뱉고 네 번째 접었을 때 비로소야 에어매트를 욱여넣을 수 있었다. 

  삿포로까지 130km. 오늘은 삿포로까지 가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중간에 멈추기도 애매한 거리인 데다 그냥 얼른 도시에 가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3일 내내 하루에 100km도 타지 못했지만 나는 국토종주에서 하루에 170km를 연속 이틀 탄 적도 있었다. 홋카이도는 정말 길다. 사람들이 홋카이도에 대해 가장 흔하게 착각하는 사실이 있다면 바로 크기일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4일 만에 갔는데, 이번엔 4일째에 겨우 홋카이도 중심인 삿포로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어제 이후로 더 이상 산길은 나오지 않았다. 근처 도시인 다키가와까지는 쭉 논밭이 펼쳐진 시골 풍경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9시를 넘어 아침을 먹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대충 지나가다 보이던 자판기에서 이로하스를 뽑아 마셨다. 그리고 출발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1000엔을 넣고 850엔 거스름돈을 자판기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갔다. 어휴 병신아… 얼마 안 가서 알 게 돼서 다행이지, 10km라도 갔더라면 그냥 포기했을 것이다. 다행히 850엔은 거스름돈을 꺼내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도 사실상 공복 상태로 20km를 달린 탓에, 다키가와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배가 고파 맛집이고 뭐고 그냥 제일 먼저 보이는 아무 가게에 뛰어 들어가다시피 했다. <카츠야>라는 가츠동을 파는 가게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일본 전역에 있는 프랜차이즈였다. 아무렴 어떤가. 이제부터 일본에 1달 이상은 체류할 예정인데 맛집 대신 흔한 프랜차이즈에 가는 것 정도야. 게다가 어제 내내 편의점 음식만 먹다가, 프랜차이즈라지만 제대로 된 음식점에서 먹는 가츠동 맛은 너무 꿀맛이었다. 

  가끔 사람들이 자전거를 그렇게 타면 뭐든 맛있지,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의 경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지친 상태에서 음식을 먹으면, 모든 음식이 맛있는 게 아니라 역으로 미각의 양극화가 발생해 버린다. 무슨 이야기냐면, 맛있는 음식은 더 맛있게 느껴지고 맛없는 음식은 더더욱 맛이 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친 몸에게 맛없는 음식을 주면 이거라도 먹어야지, 가 아니라 ‘힘들어 죽겠는데 이딴 음식을 넣어?’라고 몸이 거칠게 항변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다. 


  가츠동을 먹으니 다시 페달을 밟을 힘이 솟는다. 다키가와라는 도시를 지나가면서 잠시 국도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시골길로 향했다. 차 한 대도 잘 다니지 않아 마음 놓고 기분 좋게 라이딩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드넓은 논 한가운데에, 멀리 꼭 도회지의 쇼핑센터처럼 차들이 주차장에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먼 곳에 푸르른 산맥과 논으로 둘러싸인 한 목조 외관에 SHIRO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일본 향수 브랜드 SHIRO의 본점이었다. 사실 SHIRO라는 브랜드를 알고 있진 않았는데, 삿포로의 아는 지인이 일본에서 한창 인기가 많은 브랜드라고 해서 일부러 찾아가 들른 곳이다. 

  이런 외진 시골에 본점이 있다니. 더욱 어떤 브랜드인지 궁금해진 나는 자전거를 세워둔 채 건물의 입구로 향했다. ‘모두의 공장(みんなの工場)’이라는 입구 옆 문구에서 많은 일본인 여성들이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나는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이런 복장과 몰골로 이렇게 인스타그램스러운 곳에서 인증샷을 찍을 마음은 더욱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낮은 1층짜리 건물 같아 보이지만, 들어가자 정말 높은 천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입구의 슬로건답게 천장은 공장에서 볼 법한 형태의 대형 컨테이너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오른쪽의 공간에는 상품 매대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직접 자신이 향수를 제조해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공장이라는 콘셉트에 걸맞게, 유리창을 통해 제품 생산 라인을 직접 공개하여 직원들이 SHIRO의 제품을 만드는 모습을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다. 파란 무균복을 입은 직원들의 모습은 마치 연구실에 있는 과학자들 같아서 귀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어차피 제품들은 전국 각지에서 팔고 있다고 하니, 후쿠오카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 구입하기로 하고 나는 간단히 제품을 살펴보거나 시향 정도로만 둘러보았다. 대신 이왕 온 거 음식이라도 먹어보고 가야지,라는 생각에 시로 카페에 들렀다. 본점에만 있는, SHIRO에서 운영하는 요리와 음료를 파는 카페이다. 대부분 모든 손님은 여자고 나만 남자였다. 음료를 마실지 요리를 먹을지 고민했다. 가츠동을 먹은 지 불과 2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각선 방향에 앉은 여행객인 듯한 백인 여성 2명이 각자 피자를 한 판씩 주문해서 먹는 것을 보고, 나도 용기를 내어서 피자를 한 판 주문했다. 남자인데 이 정도는 먹을 수 있겠지.

  마르게리타 피자는 매우 훌륭했다. 신선하다는 느낌이 피자에서 느껴진다. 그도 그럴게 눈앞에 보이는 오픈된 주방 안의 직원이 화덕에서 피자를 열심히 굽고 있었다. SHIRO라고 쓰여 있는 화덕이 귀엽다. 가격도 매우 착했다. 1200엔. 한국에서 이런 피자를 먹으려면 2~3만 원은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순식간에 피자를 먹어치웠고 가게에 나와 비슷한 시간에 입장한 그 어떤 손님들보다 가장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산을 하고 나왔다. 


  이제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다시 오고 싶은 곳이었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올 일이 있을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건물에서 나와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고 떠날 채비를 했다. 시간은 2시. 남은 거리는 거의 100km다. 어두워지기 전에 과연 삿포로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다키가와에서 삿포로까지는 정말 끝없는 교외지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교외는 간판만 가린다면 영락없이 한국의 풍경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빨간색과 노란색의 보도블록. 한국 사진에서 아파트만 지우면 일본이지 않을까 싶다. 국도를 달리는 것은 지루하긴 하지만 길은 뻥뻥 뚫려있고 오르막도 없어서 오로지 달리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간간히 편의점에 들러서 음료수를 마시며 체력을 회복하는 정도로, 오늘 최대한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삿포로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만 페달을 밟는다.



  하늘이 점점 푸르스름해져갔다. 휴대폰의 화면은 오후 5시를 가리켰다. 일본은 한국보다 위치가 동쪽이어서 그런지 해가 빨리 지는 건 둘째 치고, 애초에 뭔가 해질녘과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워지기까지의 틈이라고 하는 시간이 한국보다 정말 짧은 것 같은 체감이 든다. 한마디로 한국은 해질녘이 굉장히 긴 느낌인데 일본은 정말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한국에서는 해질녘이 좋았지만, 일본에서는 뭔가 어둠이 다가오는 시간 같아서 우울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야간라이딩을 해야 할 생각에) 20분만 지나도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인다. 특히 찍어둔 사진을 비교해 보면 정말 극명히 차이 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행히 삿포로 가는 길에는 크게 외진 곳도 없었고, 차량 통행이 많은 국도다 보니 길도 너무 어둡지 않았고 달릴 만했다. 삿포로에 가까워지자 점점 차량도 많아지고 길도 밝아진다. 반짝반짝 별처럼 빛나고 있는 지평선 부근의 도시의 건물들이 보인다. 드디어 삿포로에 왔구나. 안전한 도시로 왔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아직 여행의 초반이지만 첫 미션은 해낸 것 같은 성취감. 여행으로는 한 번도 와보지 못했기에 삿포로에 더욱 기대가 컸다. 삿포로 하면 뭐가 있을까. 삿포로 맥주, 징기즈칸, 수프카레, 눈 축제… 눈이 오는 계절이 아니었기에 아쉬웠지만 (눈이 왔더라면 절대 자전거로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여름과 가을 사이의 삿포로의 매력을 찾으러 다닐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제 5분마다 라이딩을 멈춰야 할 정도로, 도심지로 들어왔다는 증거의 많은 횡단보도와 신호등들. 그리고 높아지는 빌딩 숲을 지나 저 멀리 빛을 내는 타워 하나가 보였다. 삿포로의 중심가에 위치한 TV타워였다. TV타워에 달려 있는 디지털시계가 오후 7시 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중심가를 지나던 도중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가게 하나가 보였는데, 미리 알아봐 둔 유명한 맛집이라는 <수프카레 가라쿠>였다. 숙소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기 귀찮은데 지금 먹고 갈까,라는 생각에 가게에 들러 대기번호를 받으러 갔는데, 대기팀이 무려 20팀이었다.

  그렇게 저녁으로 수프카레를 단념한 채 일단은 숙소에 들러서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삿포로에서는 3일을 머물 예정이었기에 값싼 호스텔로 예약을 했다. “자전거는 혹시 어디다 둘 수 있을까요?”라고 직원에게 묻자, 직원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숙소에는 둘 장소가 없고 바깥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에 주차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는 당황했다. 일본 유료 자전거 주차장에 주차를 해본 적도 없거니와 이틀 뒤에 비 예보도 있어서 자전거가 홀딱 젖을 텐데… 어떻게든 대안을 찾던 도중 나는 캐링백에 자전거를 넣어서 방에 보관하면 안 되겠냐,라고 직원에게 애원하듯 물었다. 

  직원은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그러면 OK.라고 마침내 허락을 해 주었다.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인 후 나는 캐링백을 꺼내어서 호스텔 입구에서 자전거를 넣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체크인을 하러 오는 투숙객들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 흘긋흘긋 나를 쳐다보는 듯해서 부끄러웠다. 캐링백이 너무 작아서 자전거의 앞바퀴도 분리했다. 하지만 자전거는 잘 들어가지 않았고 심지어는 캐링백 바닥이 찢어지기도 했다. 알리에서 산 값싼 제품을 믿은 내 잘못이지… 어찌어찌 자전거를 욱여넣듯 캐링백에 넣어 거의 반쯤 넣은 상태(핸들바나 안장은 모두 드러나 있었다)로 나는 배정받은 방으로 자전거를 끙끙대고 들고 가서 겨우 안치했다. 자전거 여행이란 매 순간이 전쟁이구나… 



  어제 역시 캠핑을 해서 샤워를 하지 못한 상태로, 가장 긴 130km를 달린 후 샤워를 하자 온몸의 노고가 씻겨져 내려가는 듯했다. 벙커 침대의 하얀 이불에 몸을 내던지자 그대로 졸도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삿포로까지 왔는데, 그냥 이렇게 밤을 아깝게 날려버릴 수는 없지… 저녁이라도 삿포로 음식을 먹자라는 생각에 겨우 몸을 이끌고 삿포로 시내로 걸어 나왔다. 

  스스키노 거리는 온통 퇴근 후 한 잔 걸친 듯한 직장인 혹은 젊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작은 마을들만 지나며 너그럽게 나에게 말을 걸던 일본인들의 목소리만 듣다가, 이런 대도시에서 큰 소리의 술 취한 일본어를 들으니, 조금 쫄은 기분이었다. 길을 걷던 도중 우연히 본 또 다른 사람들이 줄을 늘어선 가게를 보고 나도 뒤따라 줄을 섰다. <스미레>라는 라멘 가게였다. 늘어선 줄은 모두 퇴근한 직장인, 일본인들만 보였고 외국인이 보이지 않던 게 현지인 맛집 같아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신치토세 공항의 새우라멘, 최북단 소야곶에서 먹었던 가리비 시오라멘, 그리고 이번이 홋카이도에서의 세 번째 라멘이었다. 두 번의 라멘 모두 성공적이었기에 이번에도 홋카이도의 맛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미소라멘이 메인이라고 하는데, 미소라멘은 일본에서 한 번도 제대로 사 먹어 본 적이 없어서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30여 분을 기다려서 가게에 입장하고, 주문한 미소라멘이 뒤따라 나왔다. 맛은? 특징적으로 강한 맛은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미소된장의 풍미와 국물 맛, 면의 맛들이 조화를 이루는, 한마디로 밸런스가 일품인 맛이었다. 밸런스가 너무 완벽한 나머지, 특징적으로 튀는 맛을 잡아낼 수가 없어서 내가 맛에 대한 묘사를 못 하게끔 만들어버리는 맛이다. 어쨌든, 맛있다. 알고 보니 스미레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도 스미레라는 이름의 라멘이나 국물요리를 납품하고 있을 정도로 정말 전국구로 유명한 맛집이었다. 게다가 돈코츠라멘의 본고장이 후쿠오카이듯, 미소라멘의 시작점이 바로 삿포로라는 것. 그냥 길을 가다가 들어간 가게 치고는 너무나도 행운이 뒤따랐지 싶다. 

  기분 좋게 숙소로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이틀 동안 삿포로에 머물면서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떠날 예정이었다. 적당히 이동할 루트를 알아보고, 지나가는 장소의 유명한 스팟들을 찾아 구글 지도 속을 배회했다. 3일이면 홋카이도의 가장 아래인 하코다테에 도달할 것 같다. 다음 라이딩에는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일 중에도 불곰과의 조우만은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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