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종주 4.5일 차:삿포로 (0Km)
늦은 밤 삿포로에 도착한 후, 다음날 으레 ‘삿포로 추천 여행지’라는 여행 블로그 게시글에서 나올 법한 홋카이도 신궁을 찾아갔다. 도쿄의 메이지 신궁과 달리 홋카이도 신궁은 작고 아담했다. 동시에 큰 감흥도 없었다.
겨울이 아니라 그런지 막상 삿포로에 왔지만 딱히 마음이 가는 장소가 없었다. 대체로 삿포로 여행과 함께 간다는 근교의 비에이, 오타루같은 도시에 볼거리가 몰려있어서 그런 걸까?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삿포로에서 가보고 싶었던 곳은 ‘모에레누마 공원’이라는 곳이었다. 스스키노 시내에서는 꽤 거리가 있어 버스를 타고 조금 멀리 가야만 했다.
모에레누마 공원은 이사무 노구치라는 조각가이자 조경가가 설계한 공원으로, 삿포로 여행지로는 딱히 추천되진 않지만 조경학도였던 내가 한 번쯤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정말 큰 피라미드처럼 생긴 인공 언덕이 모에레누마의 특징이었는데, 겨울에는 눈이 잔뜩 쌓인 커다란 언덕이 썰매장이 되어서 썰매를 타는 것이 이 공원의 백미라고 한다.
푸른 언덕을 배경으로 공원에서는 웨딩 촬영을 하는 부부들이 꽤 보였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피라미드처럼 높은 모에레누마의 언덕을 오르는 것은 꽤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특히 자전거를 며칠 동안 타다가 계단을 오르니 허벅지가 꼭 터질 것만 같았다. 겨우 언덕 끝에 다다르자 넓은 삿포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꼭 등산으로 산의 정상 위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저물어가는 노을 아래로 하나둘씩 불을 밝혀가는 삿포로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으레 혼자만의 여행이 자신을 돌아보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스페인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지금 이 여정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막상 이곳에 서 있던 나는 딱히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남은 여정은 더욱 힘들고 고되겠지만 이 여정이 내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힘들었던 입시 준비를 하던 시절도 군대에 있던 때도 돌이켜보면 마냥 행복할 때보다 파도 같은 감정이 요동치던 때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깨달음이든 진정한 자아든 어려운 말들은 집어치우고, 사람들은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기 위해 순례길과 고난에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삿포로에서 쉬어가는 둘째 날엔 예보대로 비가 내렸다. 긴 장거리 라이딩 이후에도 쉬지 않고 이것저것 보러 돌아다니다 보니 다리가 회복은커녕 녹초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은 되도록 걷지 말자고 결심했다.
비가 오는 삿포로 거리를 정처 없이 우산을 들고 걷던 도중, 지도에서 ‘홋카이도 대학’이 눈에 띄었다. 삿포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서 걸어가기도 가까웠다. 호기심이 생겨서 걸음을 옮겨 느닷없이 홋카이도 대학을 가기로 했다. 사실 순전히 ‘학생들이 공부하는 캠퍼스라면, 앉아서 태블릿을 꺼내 글을 쓸 수 있는 장소가 많지 않을까?’라는 이유에서였다.
정문으로 들어가자 한 60대의 남성이 말을 걸었다. “혹시 무슨 일로 오셨나요?” 순간 캠퍼스가 학생 외 출입 금지인가 싶어 잠깐 당황하며 “아, 그냥 구경하려고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학교를 안내해 드릴까요? 여기 인포메이션 센터도 있어요.”라며 단지 호의였음을 드러냈다. 관광객에게도 학교를 안내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참 신기했다.
먼저 정문을 지나게 되면 커다란 녹지가 나온다. 캠퍼스에 이런 아름다운 녹지와 개천이 흐르고 있다니. 개천의 이름은 사쿠슈코토니(サクシュコトニ)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연어도 살던 강이라고 한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맑은 날씨를 상상하면 홋카이도 대학 학생들이 책을 읽거나 피크닉을 하며 쉬고 있을 것만 같은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아, 캠퍼스의 낭만. 4학년이 되고 군대까지 갔다 오니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소풍을 온 듯한 알록달록한 모자를 쓴 유치원생들이 있었다. 아이들은 우비를 쓴 채 녹지에서 제멋대로 꺄르륵거리며 뛰어놀고 있었고, 담당 선생들이 아이들을 불러 모으곤 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스타킹을 신은 것처럼 다리가 검게 탄 수상한 외국인 한 명.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큰 가로수길을 따라서 느긋하게 걸었다. 평일이지만 캠퍼스는 다소 한적했다. 아마 한국과 달리 일본의 대학교는 개강이 10월이기에 아직 방학 기간일 것이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놀랐던 것은, 주차장에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주차되어 있던 자전거였다. 일본이 자전거 왕국이라고 하는 말을 듣긴 들었지만 크게 체감을 하진 못했는데, 이 정도면 자전거 왕국이라고 인정할 만했다. 방학이지만 때때로 자전거를 탄 학생들이 보였다. 다들 비가 오는데도 일상이라는 듯이 우비조차도 없이 개의치 않고 페달을 밟고 있었다.
다갈색 벽돌로 된 고딕 풍의 한 건물이 눈에 띄어 검색해 보니 홋카이도 대학 종합박물관이라고 한다. 관광객을 위한 여러 볼거리가 있다는 말에 바로 들어갔다. 1층에는 홋카이도 대학 관련 역사가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각종 연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박제된 곰을 비롯한 여러 동물들이 눈에 띄었다. 3층에는 공룡의 뼈들이 전시되어 있어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방문객들이 많이 보였다. 구경을 마치고 다시 1층 카페로 내려오자, 복도 벽에는 한 영화 포스터와 함께 배우 오오이즈미 요의 사인이 걸려 있었다. 삿포로 출신 연예인이라 그런지 삿포로에서는 어딜 가도 오오이즈미 요의 사진이 자주 보이곤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출출해져서 박물관에서 잠시 나왔다. 홋카이도 대학의 학식은 어떨지 궁금해서 학생식당을 찾아갔다. 딱히 그렇다 할 특징은 없는 평범한 학생식당이었다. 식권을 먼저 구입하여 한 번에 식판째 식사를 받는 한국과 달리, 일본 대학교의 식당은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반찬을 골라 쟁반에 담은 후 카운터에서 함께 계산하는 방식이다.
추천 메뉴라는 규토로 동이라는 덮밥을 먹었다. 얇게 다진 소고기가 파, 김가루와 함께 올려진 덮밥이었다. 너무 얇게 다져서 식감조차 느껴지지 않고 소고기 향만 느껴졌다. 꼭 육회를 사 먹을 돈이 없는 사람이 육회를 먹는 기분이라도 내기 위해 정말 작은 양의 소고기를 얇게 다져서 밥 위에 얹어먹는 느낌이었다.
다 먹고 나올 때 즈음 아까와는 달리 식당 입구 쪽에서 학생들이 붐비고 있었다. 방학이라 한적한 줄 알았는데, 아까는 수업 중이라서 안 보였던 걸까? 삼삼오오 모여서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그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웃음소리를 듣자 갑자기 외로움이 왈칵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일본에 온 지 일주일이 되자, 내가 이 땅 위에 단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는 혼자라는 사실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I'm an legal alien, I’m an Koreanman in Sapporo….’ 스팅이 부르는 유명한 팝송의 구절처럼, 그저 나는 삿포로에 온 이방인일 뿐이었다. 홋카이도 대학에 한 명이라도 친구가 있었더라면, 혹은 이곳의 한국인 유학생 한 명쯤이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보고 말을 걸어주지 않을까.
그런 망상을 하며 다시 박물관으로 터벅터벅 걸어 돌아왔지만 정말 당연하게도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그랬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야 하는 건 나 자신인데. 그럴 용기가 없어 다시 좌석으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갑자기 창밖에서는 가늘게 내리던 비가 태세를 바꾸고 퍼부으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 너머로 옅게 전해져 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바뀔 동안, 나는 홀로 꿋꿋이 카페에 앉아서 여행기를 쓰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자 비가 그치고, 눈부신 햇살이 구름 틈을 비집고 나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무인양품에 들러 내일 먹을 음식들을 골라서 계산했다. 비가 그쳐 오호리 공원의 오텀페스트(9월 동안 맛집들이 부스를 운영하는 삿포로의 축제)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슬슬 퇴근하는 사람들과 차량이 삿포로 시내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4일 라이딩 내내 안장통이 지속되어서 자전거 가게에 들러서 안장을 새로 샀는데, 가격은 6,600엔.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한국에서 중고로 샀다면 더 저렴했을 텐데… 우니동의 타격에 이어 내 잔고와 멘탈도 연타를 얻어맞은 복서처럼 비틀댔다. 저녁은 뭘 먹지? 그러고 보니 삿포로에 와서 징기스칸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징기스칸까지 먹는 것은 내게 너무나 큰 사치다,라고 생각하고 단념해버리고 말았다.
기분이라도 낸답시고 뜬금없이 샤브샤브용 양고기를 사 와 햇반과 함께 구워 먹었다. 게스트하우스 주방에는 양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징기스칸이 아니라 양고기 향이 나는 대패삼겹살을 구워 먹는 기분이었다. 또 다른 테이블 자리에는 한 서양인 여성이 밖에서 사 온 듯한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여행객의 기운이 서로에게서 감돌았지만, 우리는 쓸쓸히 각자의 저녁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말이라도 걸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저녁을 먹어치운 뒤 프라이팬과 그릇들을 설거지한 후, 방으로 돌아가 2층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 삿포로의 외로움과 공허함으로부터, 내일은 자전거를 타고 떠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궁상을 떨던 내 인생 첫 삿포로에서의 마지막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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