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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로우 Jan 25. 2024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일본종주 5일차: 시코쓰 호수 라이딩

삿포로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아침으로 어제 무인양품에서 산 소고기 카레와 즉석밥을 먹었다. 체크아웃 키를 먼저 카운터에 건네주고,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 손님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자전거를 조심스레 끙끙대며 방에서 겨우 들고 나왔다. 캐링백에서 꺼낸 자전거의 뒤에 다시 트렁크백을 매달았다. 앞바퀴도 다시 조립했다. 매번 이러는 것도 정말 고역이다.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오랜만에 완성된 모습의 자전거를 보니 다시 달리고 싶어졌다. 다시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완성된 자전거의 모습이 여전히 멋졌다. 주렁주렁 달린 캠핑용품과 트렁크백의 모습이 완전무장한 용기 있는 모험가처럼 보였다. 나는 용기가 없는 편이다. 하지만 왠지 자전거를 타면 두려움을 이겨내게 된다. 자전거를 타면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샘솟냐고? 사실은… 그냥 힘들어 죽겠어서 두려움이고 뭐고 잊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계까지의 고통으로 우리는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남쪽으로 향하는 도요히라 강을 따라서 사이클 로드 위를 달렸다. 향하는 루트 방향과 강줄기의 방향이 서서히 어긋날 때 즈음에 강변에서 올라와 일반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해발 600m까지 오르는 오르막이 오늘 여정의 하이라이트다. 오늘 목표는 삿포로 아래로 향해 다시 바다에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삿포로 남동쪽에 위치한 치토세를 지나는 편이 훨씬 편한 평지 루트였다. 하지만 나는 기왕 다시는 오지 않을 곳인데 후회 없이 뭐라도 눈에 담고 가자는 생각으로 시코쓰 호수를 지나가는 산지 방향으로 루트를 정했다.


  본격적인 업힐이 시작되기 전 <삿포로 예술의 숲>이라는 미술관도 한 번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였다. 입구를 통과해 자전거를 타고 안쪽 도로에 진입하려는 순간, 나를 저지하는 손짓과 함께 경비원이 나와 “자전거는 주차 후에 걸어서 미술관에 가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곤 미술관을 가는 것을 일치감치 포기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를 큰 산 하나를 넘어야 하는 상황에, 미술관에서 시간을 지체했다간 숙소까지 늦어져 밤에 달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점차 민가나 건물도 드문드문해지고, 경사도는 점점 가팔라져만 갔다. 본격적으로 완전한 숲길로 들어섰다. 그래도 차는 꽤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우연히 가드레일까지 나와 풀을 뜯고 있던 사슴과 마주쳤다. 오로론라인 이후 오랜만에 보는 사슴이라 무척이나 반갑고 귀여웠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으니, 사슴 역시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웃겼던 건 정말 큼지막한 대형 화물트럭이 눈앞에 쌩 하고 지나가는데도 사슴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트럭은 무서워하지 않는데 멈춰 선 내가 무서워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니. 사슴에겐 차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인간인가 보다.

  


  낮은 기어임에도 페달은 온 힘을 다해 꾹꾹 발로 눌러야만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을 힘겹게 올랐다. 홋카이도이고 9월이라지만, 아직 햇빛이 한여름처럼 따가웠다.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려고 지도앱을 켰지만 산 속이라 전파가 터지지 않아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하고 봤는데 정말 얼마 안 올라갔다는 걸 알면 그 좌절감은 말로 다할 수 없으니까....

  차를 비롯해 나를 쌩쌩 제치고 호수를 향해 가는 듯한 바이크들이 많이 보였다. 드디어 오르막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코쓰 호수에 어서 오세요.’라는 일본어 간판이 보였다. 이후로 이어지는 이 긴 내리막만 내려가면 호수가 보이겠지? 10여 분 정도가 흘렀을까. 옆을 돌아보니 울창한 숲의 나무 사이로 새파란 호수의 단면이 보였다. 호수는 하늘의 색보다 더 새파랬다. 점점 내려갈수록 호수도 나의 시야를 메워갔다. 이윽고 호수 옆의 주차장을 낀 한 휴게소에 도착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바다 같았다. 여기가 바로 시코쓰 호수구나. 마치 조용하고 파란 거인이 산 위에 드러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시코쓰 호수는 백두산 천지의 10배 크기라고 한다. 그런 정말 커다란 담수호가 이런 높은 산 위에 있는 것도 신기했다. 삼각대를 꺼내서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관광객이 많이 보이진 않았다. 라이더들 혹은 자차를 끌고 온 일본인들이 가끔 차에 내려서 호수를 구경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시코쓰 호수의 진풍경은 이곳에 도착해서 보았던 풍경이 아니었다. 한 20분쯤을 사진을 찍거나 호수를 감상하다가, 이제 슬슬 떠나야겠다 싶어서 자전거를 타고 호수 주위를 빙 도는 국도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정말 바다보다 더,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바다가 펼쳐졌다. 와, 하고 입에서 탄성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내 생애에서 이렇게 넋이 나갈 정도로 눈부신 풍경을 본 게 언제였을까? 어떻게 이렇게 호수가 아름다울 수 있지? 드라이브하는 차량과 바이크들이 슝슝 지나다니는데, 라이딩을 하는 도중임에도 앞을 보지 않고 호수 방향으로 시선도 마음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부족한 견문이지만 내 인생에서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7km의 시코쓰 호수 라이딩은 앞으로도 절대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점차 호수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이후 호수를 뒤로 하고 벗어날 때 몇 번씩이나 ‘다시 돌아가서 조금만 더 보고 갈까?’라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마음을 이성으로 ‘아무리 보고 싶어도 지금 가지 않으면 또 숙소까지 어두운 저녁에 라이딩을 해야 해’라고 얼마나 스스로를 설득했는지. 다음에 삿포로에 온다면 꼭 다시 보러 올게.



시코쓰 호수 라이딩


  내려가는 길에 노란색의 익숙한 사슴 주의문도 보였지만, 빨간색의 눈에 띄는 주의문이 보였다. 다름 아닌 곰 주의문이었다. 이번에는 목격 정보까지 상세히 써져 있었는데, 불과 12일 전에 이 부근에 곰이 목격되었다는 정보이다. 다행히 도로에 차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사슴 주의문도 간간이 보였다. 사슴이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았던 사이 내가 가는 길 쪽에 있던 사슴들이 돌진해 오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는지 후다닥 두 마리가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나도 사슴을 처음에 보지 못해서 깜짝 놀랐다. 카메라로 도망가는 모습이라도 찍었어야 했는데.



  3시쯤 되어서 시코쓰의 산지에서 내려왔다. 도착한 도마코마이 시에서는 편의점 정도만 가볍게 들러서 음료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도마코마이에서 연안을 따라 이어지는 국도를 밟았지만 바다는 좀처럼 잘 보이지 않고 24시간 라멘집만 도로변에 드문드문 보이기만 했다. 일본에선 라멘이 한국 국밥의 포지션을 맡고 있는 듯하다. 대체로 건물이든 간판이든 모두 한국보다 온화한 느낌이지만 국도변의 라멘집만큼은 과하게 화려한 글씨와 간판으로 운전자들을 끌어들이려고 야단스럽게 떠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늘 잡아둔 숙소의 위치는 도마코마이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시라오이라는 작은 마을. 좀 더 큰 도시인 도마코마이에서 멈췄다면 좋았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비싼 호텔뿐 저렴한 숙소가 보이질 않았다. 235번 국도를 따라 시라오이를 향해 남은 거리를 달려갔다. 구글맵에서는 무로란 라인이라 적혀 있었다. 지난번 지나갔던 오로론 라인과는 같은 라인이지만 무로란 라인에는 볼만한 경치 자체가 단 한 구석도 없었다. 그저 황량한 교외지의 모습과,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 듯한 과거엔 번화했을 파칭코 건물들, 그리고 현란한 붓글씨의 라멘 가게들이 간간히 도로변에 보였다.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 녘을 바라보며 부지런하게 다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어두워지기 직전 시라오이에 도착해서,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게스트하우스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고 분위기가 좋았다. 겉으로 봐도 관광객인 것을 알 수 있는 서양인들과, 귀에 따갑도록 들리는 중국어를 구사하는 중국인 몇 명이 주방과 로비를 돌아다녔다. 이런 외진 시골 동네에도 관광객이 있긴 하구나. 시라오이에는 대체 무엇을 하러 온 걸까?

  나는 아까 전 잠시 편의점에 나가서 사온 카츠산도와 음료수 하나를 저녁으로 때웠다. 어제 5500엔의 우니동의 충격이 기억에서도 내 잔고에서도 아직 가시질 않았기 때문에 돈을 아끼고 싶었다. 대학생 무리로 보이는 듯한 일본인 여행객들이 체크인 때부터 뭔가 잔뜩 봉지에 가득 담아서 왔다. 그러더니 삼삼오오 요리를 담당하거나 야외의 테이블에 상을 차리고, 다시 모두 모여서 떠들썩하게 저녁을 먹으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국인들은 함께 온 중국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고, 넉살 좋은 서양인은(그가 남성이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나의 위안이었다) 대학생 무리와 가끔 이야기를 나누며 어디서 왔는지, 등에 대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대학생들은 이미 갔다 온 건지, 아니면 갈 예정인지는 못 알아들었지만 홋카이도의 시레토코 반도 여행을 왔다는 것 같았다.

  대화를 흘깃 엿듣는 채 주방에 홀로 앉아 카츠산도를 먹고 있자니 점점 오늘도 외로워져만 갔다. 나는 왜 이런 외로움을 굳이 껴안으면서까지 일본을 홀로 라이딩하고 있는 것일까? 붙임성 없는 내 성격조차 미워질 정도였다. 내가 미남이었더라면... 이런 어린애나 할 법한 망상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한심하다. ROKA티를 입고 있었지만 한국인이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째 날 한국인인 것을 알아보고 한국어로 말을 걸어주던 일이 별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스트하우스 야외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그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2층의 도미토리 룸으로 올라가서 씻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높은 오르막 라이딩으로 지친 다리가 내게 사람들은 신경쓰지 말고 얼른 자자고 말을 건다. 그래, 난 일본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종주를 하러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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