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일본종주 5일 차: 삿포로~시라오이(95Km)

by 루로우

어젯밤 저녁을 먹었던 주방에서 소고기 카레와 즉석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 손님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자전거를 조심스레 끙끙대며 방에서 겨우 들고 나왔다. 캐링백에서 꺼낸 자전거에 다시 트렁크백을 매달고 앞바퀴도 다시 조립했다. 매번 이러는 것도 정말 고역이다.


이틀을 쉰 뒤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오랜만에 완성된 모습의 자전거를 보자 다시 달리고 싶어졌다. 다시 힘든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전거에 주렁주렁 달린 캠핑용품과 트렁크백을 바라보면 다시 그 여정에 뛰어들 용기가 생긴다. 자전거를 타면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가 샘솟는 걸까? 3년 전 국토종주를 할 때, 시골에서 들개에게 쫓긴 뒤 너무 무서워서 자전거를 더는 타고 가지 못하겠다 싶을 때가 있었다. 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중 출입금지라는 표지판에 가로막혀 몇 킬로는 돌아가야 했을 때. 그때 페달을 밟았던 것은 용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힘들어 죽겠다는 괴로움 때문이었다. 그 괴로움이 두려움조차 이기고 나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통장이 0원이 되어서야 두렵고 하기 싫었던 물류 알바라도 문자로 지원하는 것처럼. 사람은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 그때서야 용기를 내는 것이다.


도요히라 강을 따라 남쪽을 향해 달렸다. ‘시코쓰호’라는 유명한 호수로 가는 600m의 오르막이 오늘 여정의 하이라이트였다. 사실 치토세 쪽으로 향하는 편한 평지길도 있지만, 기왕 다시는 오지 않을 길인데 후회 없이 뭐라도 눈에 담고 가자는 생각으로 호수를 지나는 산지 방향으로 루트를 정했다.


점차 민가와 건물도 드물어지고 도로의 경사도는 조금씩 가팔라져 갔다. 본격적으로 건물이 보이지 않는 숲길로 들어섰다. 우연히 가드레일까지 나와 풀을 뜯던 한 사슴과 마주쳤다. 오로론 라인 이후 오랜만에 보는 사슴이었다. 웃겼던 건 정말 큼지막한 화물 트럭이 눈앞에 쌩 하고 지나가는데도, 사슴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자리에 선 채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트럭은 무서워하지 않는데, 멈춰 선 내가 무섭다니. 동물에게 달리는 차량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는 인간 그 자체인가 보다.



온 힘을 다해 페달을 꾹꾹 발로 누르면서, 땀을 뻘뻘 흘린 채 오르막을 힘겹게 올랐다. 홋카이도이고 9월이라지만 아직 햇빛은 한여름처럼 따가웠다.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려고 구글 지도를 켰지만 산 속이라 전파가 터지지 않아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많이 올라왔다고 생각하고 봤는데 정말 얼마 안 올라갔다는 걸 알면 그 좌절감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차를 비롯해 나를 쌩쌩 제치고 호수를 향해 가는 듯한 바이크들이 많이 보였다. 드디어 오르막의 끝을 알리는 ‘시코쓰호에 어서 오세요.’라는 일본어 간판이 보였다. 이제 내리막만 내려가면 호수가 보이겠지? 10여 분 정도가 흘렀을까, 옆을 돌아보니 울창한 숲의 나무 사이로 조용하고 파란 거인이 산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내리막을 내려와 호수 앞의 휴게소에 도착했다. 하늘보다 호수가 더 새파랬다. 시코쓰호는 호수라기보다 마치 산으로 둘러싸인 바다 같았다. 실제로 시코쓰호는 백두산 천지의 10배 크기라고 하는데, 이런 높은 산 위에 이렇게 많은 물이 어디서 왔는지도 신기했다. 삼각대를 꺼내서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관광객이 크게 붐비지는 않았다. 바이크를 타고 온 라이더들, 혹은 자차를 끌고 온 일본인들이 가끔 차에 내려서 호수를 구경하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슬슬 호수를 떠나야겠다 싶어 호수 주위를 빙 도는 국도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정말 바다보다 더, 눈이 시릴 정도의 새파란 바다가 펼쳐졌다. ‘와…. 하고 나도 모르게 조건반사처럼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 생애에서 이렇게 넋이 나갈 정도의 풍경을 본 적이 있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호수가 아름다울 수 있지? 드라이브하는 차량과 바이크들이 슝슝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전방을 주시하지 못하고 호수 방향으로만 자꾸 시선을 빼앗겼다.


부족한 견문이지만 내 인생에서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호수였다. 7킬로의 시코쓰호수 라이딩은 앞으로도 절대 잊지 못할 것만 같다. 점차 호수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수를 뒤로 하고 벗어날 때, 몇 번씩이나 ‘다시 돌아가서 조금만 더 보고 갈까?’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추스르며 ‘아무리 보고 싶어도 지금 가지 않으면 또 숙소까지 어두운 저녁에 라이딩을 해야 해.’라고 얼마나 스스로를 설득했는지. 다음에 삿포로에 온다면 꼭 다시 보러 올게, 시코쓰호.

시코쓰 호수 라이딩


내려가는 길에 익숙한 노란색 사슴 주의문이 보였다. 개중 빨간색의 눈에 띄는 주의문이 보였는데, 다름 아닌 곰 주의문이었다. 주의문 아래에는 목격 정보까지 상세히 써져 있었는데, 불과 12일 전 이 부근에서 곰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도로에는 차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도로를 내려가는 길에,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았던 사이 내가 가는 길 쪽에 있던 사슴들이 돌진해 오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는지 후다닥 두 마리가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카메라로 도망가는 모습을 찍었어야 했는데.


3시쯤 되어서야 시코쓰의 산지에서 평지로 내려와서, 도착했던 도마코마이라는 도시에서는 편의점에만 가볍게 들러 음료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도마코마이에서 연안을 따라 국도를 밟았지만 바다는 좀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24시간 라멘집만 도로변에 드문드문 보였다. 일본에선 라멘이 한국에서의 국밥 같은 포지션을 맡고 있는 듯하다. 대게 건물이든 간판이든 모두 한국보다 일본이 온화하고 차분한 느낌이지만, 국도변의 라멘집만큼은 과하게 화려한 글씨와 간판으로 운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야단스럽게 떠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늘 잡아둔 숙소의 위치는 도마코마이에서 30킬로 정도 떨어진 시라오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235번 국도를 따라 시라오이를 향해 남은 거리를 달려갔다. 구글 지도에서는 이 도로를 무로란 라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오로론 라인과는 같은 라인이지만 무로란 라인에는 딱히 볼만한 경치 자체가 단 한 구석도 없었다. 그저 황량한 교외 풍경과, 한때 번화했으나 이제는 버려진 듯한 낡은 파칭코 건물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듯한 현란한 붓글씨 간판의 라멘 가게들이 간간히 도로변에 보였다. 그와 함께 저물어가는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부지런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어두워지기 직전 시라오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게스트하우스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고 분위기가 좋았다. 겉으로 봐도 관광객인 것을 알 수 있는 서양인들과, 귀에 따갑도록 들려오는 중국어를 구사하는 중국인 몇 명이 주방과 로비를 돌아다녔다.


잠시 편의점에 나가서 사온 카츠산도와 음료수 하나를 저녁으로 때웠다. 대학생 무리로 보이는 듯한 일본인 여행객들이 체크인을 하러 들어왔는데, 뭔가 잔뜩 담긴 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야외 테이블에 상을 차리고, 모두 모여서 떠들썩하게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함께 온 중국인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넉살 좋은 서양인 관광객이 대학생 무리와 가끔 이야기를 나누며 어디서 왔는지, 등에 대해 잡담을 나누었다. 대학생들은 이미 갔다 온 건지, 아니면 갈 예정인지는 못 알아들었지만 홋카이도의 시레토코에 여행을 왔다는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의 로비에 흐르는 대화를 흘깃 엿들으며 주방에 홀로 앉아 카츠산도를 먹었다. 오늘도 점점 외로움이 밀려왔다. 왜 이런 외로움을 굳이 껴안으면서까지, 일본을 홀로 라이딩하고 있는 것일까? 붙임성 없는 내 성격이 미워졌다. 여행 유튜버들은 친구도 만들고 함께 놀러도 다니고 하던데. 일본 종주를 오면 이곳저곳 일본 전국의 일본인들과 담소를 나누고, 친구가 되고, 인연을 맺는 상상을 하고 왔다. 내가 미남이었더라면… 이런 어린애나 할 법한 망상이나 하고 있다니. 첫째 날 한국인인 것을 알아보고 한국어로 말을 걸어주던 스튜어디스, 게스트하우스의 스태프가 그리워졌다. 첫째 날이 정말 별난 상황이었던 것이다.


야외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목소리를 피하듯이 2층으로 향해 도미토리의 침대에 누웠다. 높은 오르막 라이딩으로 지친 다리가,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자고 말을 건다. 그래, 난 일본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종주를 하러 온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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