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1패를 당한 지각생이 되다
약속 시간은 아직 넉넉하다. 빨래를 널고 재래시장에서 장을 봐오고 내 페이스대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 딱 맞을 시간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왠지 분주해진다. 마스카라까지 완벽하게 화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로션과 선크림이 전부인 1분 화장법에 치실질 추가된 양치까지 오분이면 해결인데, 양치를 하며 옷 방으로 건너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고 욕실과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괜히 종종걸음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다. 약속에 늦은 것도 아닌데 다음 할 일이 뭔지도 모른 채 날 허둥대게 만드는 원인. 그것은 바로 출발시간 1시간 전부터 채비를 다 마치고 거실에 앉아 내 뒤꽁무니만 바라보는 엄마 아빠 때문이다. 시간도 넉넉해 바쁠 이유 하나 없는데, 소파에 앉아서 언제 출발할 거냐는 재촉 아닌 재촉을 해대는 엄마다. 군에서 휴가를 나온 조카를 만나러 부모님을 모시고 언니네를 방문하기로 한 날. 출발시간을 정확히 일러뒀음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는 언제 출발할 거냐 되묻고, 아빠는 소파에 앉아 헛기침을 하시며 종종걸음을 하게 한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르신들의 경우가 대체적으로 일찍 서둘러 출발하고, 혹은 남편들은 대체적으로 단장하는 아내를 기다리기 일쑤라고 하니 우리 집 일만은 아니겠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나 동행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약속은 칼처럼 지켜야 한다는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철학일까? 아니면 바쁠 것 없는 한가한 분들의 페이스인 걸까? 늦지도 않았음에도 혼 빠진 사람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 보니 슬슬 짜증이 나기도 한다. 의문의 1패, 의문의 지각생이 되어서 호들갑을 떨고 집을 나서니 역시나 약속했던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반가운 조카의 얼굴과 맞이해주는 언니네 가족들의 웃음을 10분 일찍 본 거다. 혼 빠진 지각생은 웃는다. 오랜만에 보는 조카의 얼굴에 기분은 풀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낫지, 기다리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배려와 다른 사람의 시간도 소중히 여기겠다는 의지, 손주 얼굴 조금 더 일찍 보고 싶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정스러운 사랑... 그게 어디 흉 잡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