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참외밭에서 만난 소년
소년의 뒷머리가 버들잎 가지처럼 바람에 춤을 춘다. 작은 야산 너머의 수박밭으로 소년의 뒤를 쫓아가며 어젯밤 소년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이야기인즉슨, 이쪽 마을에 사는 오첨지네 장남 오달구하고 건너 마을 김씨네 막내딸 김봉순이가 꽁냥꽁냥했는데 오달구네 집에서 김봉순이를 반대했다. 하여 두 사람은 매일밤 중간지점인 야산의 고개에서 남몰래 만나 사랑의 아픔을 나누었단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오달구가 보이질 않자 김봉순이 매우 걱정하며 하루 이틀 사흘….결국 오달구가 양반집 규수와 혼인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곡기를 끊고는 고개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죽었다는 갑돌이와 갑순이 이야기였다. 우리나라 시골 마을 곳곳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버무러져 고개 하나에도, 길가의 큰 돌 하나에도 사연이 있으며, 그것은 곧 우리네 사는 이야기가 고착된 것이리라.
참외밭은 굉장히 넓었다. 어린 내가 만평,천평이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밭이었다. 평화로움이 뒤덮은 참외밭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던 아저씨가 소년을 반갑게 맞이한다. 조씨 아저씨라고 하는 그 분은 소년에게 집안의 안부를 묻더니 다시 허리를 구부려 숙련된 솜씨로 참외를 바구니에 담았다. 소년은 바구니의 참외 하나를 내게 건네더니 아저씨를 뒤를 따라가며 참외를 따는데 솜씨가 별로였다. 한 눈에 보아도 어려워 보이는 참외따기를 일찍이 포기한 채 나는 밭 모서리 정자에 앉아 단 맛이 코 끝까지 느껴지는 참외를 잘도 씹어 먹었다. 소년도 참외 몇 개를 따는 것 같더니 이내 정자위에 올라와 벌러덩 눕더니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을 부는 어른은 봤어도 휘파람을 부는 아이는 처음이라 신기하게 쳐다보니 이번에는 우쭐거리며 산토끼를 분다. 산토끼 휘파람 가락에 발을 맞추는데 저 멀리서 소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차츰 가까워지는 그 소리의 주인공은 소년의 시골친구라고는 믿기지 않는 큰 키에 도심형 스타일의 소년, 아니 소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성장해있는 딱 봐도 오빠였다. 참외밭에서 인사를 나눈 조씨 아저씨의 장남이며 온양에서 자랑하는 수재 조기혁이라는 소리는 집에 돌아와서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