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밤 8시의 외출
일기장은 텅 비어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온양에 내려왔고 낯선 곳에서 낯선 기분에 취해 일기나 숙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가지고 온 방학 책도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채 그대로 가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 저녁 밥상에서 아주머니가 숙제에 관해 묻기 전까지 잊고 있었다. 겸사겸사 곤충 채집까지 완수할 것을 다짐하고 왔는데 곤충은 커녕 그 흔해 빠진 잠자리 한 마리 잡지 않았던 거다. 날짜를 세어보니 밀린 일기를 마치 그날 쓴 것처럼 생생함을 보태서 써야 할 날이 일주일이었다. 그래도 그날은 소년과 조기혁오빠와 별을 보러 가는 날, 갑자기 밀려든 일기걱정은 아주 잠깐이었다. 저녁을 먹고 셀레는 가슴으로 어둠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보기는 소년에게 건넨 제의였지만 소년을 매개로 나와 가까와지고 싶은 마음이라고 어이없는 착각을 하며 혼자 수줍어하기도 했다. 소년이 말한 조기혁 오빠와의 접선 장소는 이른바 온양 산양리의 가장 큰 그러나 비어있는 정미소였다. 집 마루 한 가운데에 붙어있는 괘종 시계 유리문에 박혀있던 온양정미소. 바로 그곳이었다. 어서 빨리 약속시간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내 마음과는 달리 주걱같이 생긴 무쇠추의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는 듯 느릿느릿 게으름을 피우는 시계를 노려보다 짧다란 레이스가 민소매 끝자락에 달려있는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로 갈아입었다. 이윽고 저녁을 지나 깜깜한 밤, 약속시간 8시가 채 되기도 전에 소년과 나는 조용히 대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