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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신엽 Feb 11. 2016

신화와 우주발생적 순환 과정

리뷰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을 읽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 민음사(2004)


온 세계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연구한 '조셉 캠벨'에 따르면,

모든 이야기에는 –이야기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는 – 소명을 받고 모험을 떠나 돌아온 영웅의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나라별 시대별 민족, 문화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야기는 모두 거의 동일한 형태의 여정을 가지는데 성공한 영웅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비참하게 실패한 영웅의 모습도 찾을 수 있지요.

'조셉 캠벨'은 영웅의 여정을 영웅(주인공)이 속해 있던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는 '출발'에서부터 '모험에의 입문' 그리고 '귀환'까지의 과정을 모두 18 혹은 19단계로 구분하는데 이를 두고 어떤 공동체의 자격 획득을 위한  ‘통과 의례’라고도 이야기합니다(영웅의 귀환 여정은 줄여서 12단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를 풀어 정리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쉬운 예를 위해 오른 쪽에는 2013년 개봉된 슈퍼맨 이야기 – 영화 '맨 오브 스틸'을 해석해 보았습니다.


1. 출발

영웅의 귀환 여정 1 ~ 5

2. 입문

영웅의 귀환 여정 6 ~ 11

3. 귀환

영웅의 귀환 여정 12 ~ 18

※ 그림이 잘 안보이시는 분들을 위해 다운로드 할 수 있는 파일입니다.


영웅의 귀환 여정은 이야기라는 '서사'가 가져야 하는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발단-전개-위기-절정 -결말 이라는 문제 기반형 스토리텔링(영웅이 여행을 떠나야 하는 고민과 위반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조셉 캠벨이 말하는 '신화'는 '부족 공동체'를 위한 '규범적 역할'과 '제의 기능'에 관해서만은 아닙니다. 

그가 각양각색의 신화로 이야기하되 영웅의 귀환 여정을 통해 드러나는 신화의 구조를 통해 말하려는 바는,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다.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탄생 한다’ 라는 

'우주 발생적 순환의 세계관'입니다.


영웅의 여정을 보아도 기존 세계에서 분리된 후(하나에서 둘로) 험난한 고난을 거쳐 다시 기존 세계로 돌아오는(둘에서 다시 하나로) 과정이며 나와 적대자가 본질적으로는 하나였음을 그리고 이승과 저승이라는 두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 '맨오브스틸'에서의 '조드 장군'은 '크립톤' 행성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행성을 재건하기 위해 지구를 파멸시키려 하고, 그를 막는 '칼엘' 역시 '크립톤' 행성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행성 재건의 희망을 지구의 인류의 번영으로 기대하는 본질적으로 하나

'다크나이트'의 '배트맨'과 '죠커'는 '강한 선'(배트맨)이 '더 큰 악'(죠커)을 불러온다는 선과 악을 넘어선 어떤 본질에 있어 '배트맨'과 '죠커'는 하나


이러한 순환의 과정에 대해 그는 유출– 처녀 잉태 – 영웅의 변모 – 소멸이라는 틀로 이야기 합니다. 


1. 먼저 이승이라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유출

'플라톤'이 이 세상을 설명한 방식으로는 ‘이데아’라는 본질이 있지만 감히 인간은 다가갈 수 없고 다만 동굴 속(이승)에 갇혀 ‘이데아’의 그림자(현상)만을 볼 수 있을 뿐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본질과 분리된 지금의 세계를 말합니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중 하나가 '이원론'이듯이 이 세상은 본질과 그림자로서 둘로 나뉘었습니다.


2. 그리고 시간과 공간과 인과라는 우주적 알의 껍질, 자궁을 통한 처녀 잉태

우리가 잉태되고 태어난 '자궁'의 본질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안에서 '원인과 결과'라는 우주적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처녀 잉태라 함은 많은 영웅 신화에서 보듯 그 영웅의 남다름을 이야기하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의 틀에서 각자 모두 나름의 소명을 갖고 태어난 자아 - 하나의 소우주 - 입니다.


3. 운명 지워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성취하며 영웅으로 변모해 가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영웅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 전사로서, 애인으로서, 황제로서, 폭군으로서, 구세주로서, 성자로서 아니 그

보다 많은 천 가지 그 이상의 모습으로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영웅은 선한 의지를 가진 자만을 이야기하지는않는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궁에서 태어난 영웅의 변모는 그가 행사하는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니체'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 회귀’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니체는 이 세상이 영원히 회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대로의 순환이 아닌 우리가 제각기 행사하는 '힘의 의지'가 부딪치며 반작용이 생성되고 다시 변화하는 과정이 순환한다고 하지요. 

어떻게 보면 ‘인과의 순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헤겔'을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헤겔이 말하는'정반합의 변증법적 사관'에 있어 결과였던 ‘합’이 또 다른 원인이 될 수 있는 ‘정’이 되고 또 다른 ‘반’이 되어 충돌하며 다시 ‘합’을낳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의 영원한 순환이겠지요


4. 마지막으로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되는데 그 끝은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을 뿐이라 합니다.

하지만 '소멸'은 마지막이 아닌 '또 다른 탄생'일 것입니다. 

인도의 신 '크리슈나'가 “나는 모든 피조물의 가슴 안에 있는 실재다. 나는 모든 존재의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라고 말했고 이집트의 ‘오시리스의 아무개에게 바치는 장’에서 ‘나는 어제이며 오늘이고 내일이다’ 라고 말했듯이 완성된 결과(둘이 하나로 된)는 또 다른 원인(결과를 낳는-둘이 되는)이 될 수 있는 발생론적 순환이 이어지게 됩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으로 시작된 서양의 철학은 합리주의(이성)를 낳고 시작(원인)과 끝(결과)이 분명한 선형적인 사관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물론 인류는 합리주의를 통해 과학이라는 진보를 낳고 미래를 낙관할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까지의 합리주의(모더니즘)가 가졌던 한계와 선형적인 사관을 비판하며 해체 운동(포스트 모더니즘)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의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지금일 것입니다.

순환과 양끝의 중용을 이야기하는 불교와 동양 철학의 재조명이 그럴 수 있겠고 완전 시장을 가정한 경제학 모델들의 수정 요구가 그럴 수 있겠고 합리주의의 결정체, 논리학에서 말하는 참과 거짓이 이젠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는 ‘맥락(Context)’에서 논의되는 한편, 엄정한 방법론의 물리학에서도 역시 양자역학의 분야에서 우리가 객관적인 측정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측정이라는 그 자체의 외부적 영향력이 개입된 사건일 뿐이다 라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은, '원인과 결과의 세상'이 소멸해 가며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세상'으로 태어나는 발생론적 순환 과정의 한 가운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셉 캠벨'이 그의 신화 연구를 통해 우리를 깨닫게 해주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고 지금의 합리주의를 폐기하자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세상의 진리를 알려주는 유효한 방법론임에는 여전히 틀림없습니다 다만 세상을 연결 지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한계가 있어 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단순화 시킨 접근법(경제학에서 말하는 모델)을 세우고 원인과 결과라는 짧은 지평에서 생각해왔다면 이제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지평의 확대를 모색하자는 '발안'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인류가 눈으로 볼 수 있었던 원인-결과의 짧은 지평에서 나아가, 결과가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금의 디지털 시대(아직은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역시 합리주의의 발전으로 태어난 것이지요. 

디지털 시대란 이제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대, 즉 '원인과 결과의 세상'에서 '결과가 또 다시 원인이되는 현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성의 세계’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며 조셉 캠벨이 말하고자 하는 숨은 상징을 찾기란 사실 쉽지는 않습니다.

책에서 드러난 이야기야 누구에게나 같을 지 모르지만그 안의 의미는 아마 각자에게 다르게 읽혀질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치 하나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아닌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처럼.

이는 책이 '단정'과 '정의'로 말하는 대신 수 많은 신화를 통해 읽는 이가 스스로 유추하게 끔 쓴 것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까뮈’가 ‘이방인’을 쓸 때 고립된 개인을 표상하기 위해 모든 문장을 접속사 혹은 접속어로 연결되지 않는 독립 문장으로만 서술한 사례가 유명합니다.

아마 위대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과 '이윤기'(번역자) 님도 일부러 모든 문장을 유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상징과 비유로만 쓰지 않았을까? 하네요 ㅋ 


작년에 완독했지만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내려 놓고 조금씩 조금씩 숨은 상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고 할까요?

이 책을 다시 한번 읽게 되면 지금과는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될것 같은데 , 

그게 아마 이 책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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