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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Oct 13. 2020

산후우울증에 걸린 남자

친구 중 온몸이 근육덩어리인 녀석이 한 명 있다. 대학시절부터 온갖 운동을 좋아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새벽에 전화를 걸어왔다. 보통은 이렇게 늦은 시간 연락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다소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유부남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심한 밤 걸려온 전화의 내용은 매우 뜻밖(?)이었고, 긴 통화는 나를 몹시 당황시켰다.

그가 스스로 '산후우울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산후우울증? 늦은 밤 저 친구가 전화를 건 이유가 '산후우울증'이라니...

난 처음 당황을 금치 못했다. 내 주변 남자들에게서는 처음 듣는 단어인데, 심지어 다름 아닌 이 녀석이!?

불과 얼마 전 와이프의 출산 소식을 접하고 다 같이 축하주도 거하게 마셨건만 정말이지 난데없는 소식이었다.


제3자인 내가 보기에 그 친구의 가정은 매우 화목했다. 맞벌이인 친구 부부는 번갈아가면서 육아휴직 중이었는데, 지금은 내 친구가 6개월 째 아이를 돌보고 와이프는 복직을 한 상황이었다. 딸과 보내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말하며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친구의 모습은 항상 동기들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가족이 함께 매일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사진과 영상도 SNS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친구는 우리 중 단 한 명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 없을 만큼, 덩치와는 다르게(?) 매우 밝고 온화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요즘 불면증은 물론 기억력이나 집중력도 없어지고 우울감이 극에 달한다는 것이다. 별 것 아닌 일에 계속 슬픈 감정에서 빠져나오기 힘들고 가슴이 답답해 호흡도 불편해졌다고 했다. 특히 걱정인 것은 부정적인 언어를 이따금 본인도 모르게 사용하면서 너무 불안하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여러 이야기를 수십 분 듣고 있자니 친구의 상태는 퍽 좋지 않아 보였다. 오늘의 전화도 초조함이 커져 폰만 만지작거리다가 무턱대고 통화 버튼을 누른 것이라고 했다.




산후우울증은 출산 후 대다수의 여성들이 겪는 일이라고 미디어에서 자주 봐왔다. 친구와 통화를 마친 뒤 검색을 해봤는데, 무려 85%에 달하는 여성들이 일시적으로 우울감을 경험한다고 한다. 대부분 일상적 장애를 초래하지 않을 정도로 경미하지만, 이따금씩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한 상황까지 가기도 한다는 내용.


그런데 거의 모든 내용들은 여성들의 경우만 열거하고 있었다. 의학백과와 뉴스 기사는 '산모'라는 주체로 시작되는 글들이 전부였고, 사용되는 사진이나 기타 자료들 역시 모두 여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후우울증'이라 함은 산전/후의 급격한 호르몬 변화 등을 원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인」을 조금 더 잘 살펴보면 부수적으로 이런 부분들이 있다.


아이 양육으로 인한 피로, 수면장애, 충분치 못한 휴식, 스트레스, 생활상의 변화

아이 양육에 대한 부담과 걱정, 신체상의 변화로 인한 불안감

-  출처 : 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포털 의학정보 - 산후우울증의 원인 중 발췌


이 「원인」들을 보고 있자니 '산후우울증'이 비단 여성들에게만 찾아올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걱정됐던 탓에 한 동안 열심히 다양한 리포트를 찾아보고 또 읽어봤다. 이미 해외에서는 이와 관련한 여러 연구도 진행되고 있었다. '산후우울증'을 겪는 남성들에 대한 내용도 꽤 많았다. 여성과 남성의 우울감이 동일하게 나타나더라도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리포트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내용은 대략 이렇다. 엄마들의 산후우울증은 아이들의 정서장애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반면, 아빠들의 산후우울증은 행동장애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과 남성의 특징이 명백히 다른만큼 초래되는 문제점 역시 퍽 다르다는 게 여러모로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놀랍게도 그 친구의 연락 이후 정말 많은 유부남 지인들에게서 비슷한 내용의 토로가 들려온다. 혹시나 싶어서 술자리에서 물어본 사람들에게도 공통된 답변이 많이 쏟아졌다.


왜 딱히 내색을 하지 않았냐고 묻는 내게 본인의 '서투름'과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얘기하는 경우도 많더라. 그래서 나는 작금의 상황들이 꽤 심각하게 여겨졌다. 무엇보다 그들은 가정에 큰 애착을 갖고 있거나 육아에 많은 열의를 보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역할은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최근 뭇 많은 남성들 역시 내 친구처럼 육아와 살림에 참여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공동육아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 점차 바뀌어 나가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이 문화를 보다 내실 있게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후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이슈들은 이제 남성들 역시 충분히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이 된 것 같으니 말이다.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가 생기면서 남자든 여자든 여러 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주변환경도 그렇고 심리적인 부분 역시 크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껏 경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일 테다.


늘 세상의 모든 부모들을 볼 때마다 대단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이들과 마주할 때에 존경을 넘어 무언가 '어려운' 마음도 든다. 태어나 처음 겪는 최고 난이도의 환경변화. 그 누구도 완벽한 가이드를 제시해줄 수 없는 이 상황을 꿋꿋이 타개해가며 본인들을 녹여내는 모습들. 정말 깊은 응원을 보낸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을 때- 당신들처럼 멋진 모습이기를.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친구놈에게 어떤 응원을 보내줘야 할까 고민을 거듭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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