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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Oct 09. 2020

사랑이 '죄'가 아니려면

유부남을 좋아한다던 후배, 그런 후배를 응원했던 모두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올해 굉장히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명대사(?)'다. 인터넷과 방송 등 각종 미디어에서는 이 밈(meme)이 대단히 유행했고,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 재미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이 문장이 한참 유행할 때, 나는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10여 년 전쯤, 나는 여러 방송국과 콘텐츠 회사를 전전했다. 그 후배는 그 시절 만난 사내 동생이었다. 회사 짬밥을 먹다 보니 후배들도 여럿 들어왔는데,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와 30대 이상이 많았고, 여자들의 경우는 20대 중후반이 보통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당시 기수들 중에서는 거의 리더에 가까웠을 만큼 눈에 띄었던 친구였다. 후배 기수들을 모두 잘 리드해주었고 직장생활도 맡은 소임에 굉장히 충실했던 남다른 능력의 여자 후배.


당시 우리 사무실은 YB vs OB 구도가 굉장히 강했다. 미디어사 특성상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의견 대립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정말 단 한 번도 의견이 일치된 적이 없다. 그래도 나와 동기들은 나름(?) '우린 아직 젊다'는 신념 하에 YB 쪽 의견으로 많이 손을 들어주던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후배들과는 꽤 긴밀한 편이었고 회식을 제외한 우리끼리의 소소한 모임도 많았다.


한 번은 후배들과 연말 대형 프로젝트를 마치고 우리끼리 뒤풀이를 갔을 때였다. 그 시절의 우리 또래들이 늘 그러하듯, 연애 얘기가 메인 주제가 되어 이야기가 흘러갔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관심이 그 리더 격의 후배에게 집중됐다. 회사 생활 몇 년 간, 그녀가 연애를 한다는 이야기를 어느 누구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썩 표정이 좋지 않아진 그녀의 모습을 보곤 모두 눈치껏 다른 소잿거리로 말을 돌렸다.


이후 2차, 3차로 이어진 술자리. 하나둘 집에 가기 시작했고 남은 것은 고작 네댓 명이었다. 동생들은 모두 귀가했고 후배 기수에서는 그녀만이 남았다. 내 동기들은 여럿 남아 마지막으로 호프를 한잔 하러 이동하기로 했는데 그녀 역시 따라오겠다고 하는 것이다. 다들 흔쾌히 그러라 이야기했고, 우리는 깊어가는 새벽 조그만 호프집으로 향했다. 그 후배는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 것 같았는데, 호프집에 들어오자마자 500 생맥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고생 많았다고 이야기하는 녀석들 말에 대뜸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는 그녀.


"선배님들 저 김 아무개 팀장님 좋아해요!"


다들 한 동안 정적이었다가, '맞아 나도 김 팀장님 좋아하지!' 내지 '김 팀장님 최고지!'라는 말을 마구 해대며 너스레를 떨어댔는데, 이런 행동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녀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두 정확히 알아 들었다는 것. 둘째로, 김 아무개 팀장님은 유부남이었다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술이 확 깨버린 나와 동기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든 방어해주고 싶어서 온갖 너스레는 다 떨며 그녀의 말을 모른 척했다. 그녀가 혹여 다음날에라도, 술김에 실수했다 여길 수 있었기에 우리 역시 모르는 체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그런 우리를 다독였다.


"아! 선배님들! 심각하게 생각하는거 아니죠? 막 뜨겁고 그런거 아니에요! 말하니까 속 시원하네요! 같은 프로젝트 하면서 언젠지 모르겠는데 그냥 좋아졌어요. 그냥 멋있어 보이고, 막! 막! 좋더라고요. 싫어할라고 노력하긴 하는데 이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잖아요. 저도 나름 노력은 하고 있어요. 저 혼자 좋아하는 거지 다른 생각도 없고요. 어차피 내년도 파트도 모두 나눠져서 팀도 달라졌는데, 저는 해외사업파트로 중국 가있을 거니까 차라리 잘됐죠 뭘."


덤덤히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에게서 희한하게도 대단한 용기를 보았다. 더불어 침착하게 자신의 감정에 대처한 그녀가 나는 굉장히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말이 맞다. 감정이라는 것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는 그것이 사랑이든, 화든, 분노든, 참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며 산다. 그녀는 본인에게 닥쳐온 '불가항력의 감정'을 적절히 피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고, 그것을 무리 없이 원활하게 해내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 왼갖 감정들을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신의 영역이지 않을까.

다만, 우리 인간은 적어도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노력은 할 수 있다.

마치 그 후배처럼.


그녀는 정말 최선을 다했고, 본인의 감정에 지배되지 않기 위해 격렬하게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밝힌 후배의 이야기에 누구 하나 비난 혹은 조언 따위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듣고 고개를 끄덕여줬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게 퍽 위로가 됐던 모양인지, 금세 다른 이야깃거리로 화제를 돌리더니 본래 모습을 찾았다.


당시의 우리는 모두 그녀에게 응원을 보냈다.

요즘 드라마 속 이태오(극 중 명)의 대사가 곳곳에서 퍼져 나온다. 이때마다 나는 그 후배가 떠오른다.

그녀야 말로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나는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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