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보면 관심이 가는 책들과 작가들이 생기고 거기에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관심사가 이리저리 뻗어나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도서관 어린이실을 뒤지다가 특이한 이름 하나에 시선이 머물렀다. 야누쉬 코르착. 그는 의사이자, 작가, 고아원 운영자, 교육학자, 아동 인권운동가였던 유대계 폴란드인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중 고아들의 비참한 모습들을 많이 본 후 어린이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30년 간 유대인 고아원을 운영한다. 그러던 와중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상황이 극심하게 어려워지는데, 유대인 게토 구역이 정해지고 그곳에 갇히게 되어 고아원 운영이 매우 힘들어져도 결코 포기하지 않다가 결국 나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고아들과 함께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는다. 그는 이미 작가로서, 인권 운동가로서 명망이 높았던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여권과 은신처를 제공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은 고아들과 살고 죽겠노라며 수용소로 가는 기차로 가는 길을 고아들과 소풍 가듯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즐겁게 행진하여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나 가슴에 남아 자연히 그의 저서들에게도 관심과 궁금증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지은 책의 내용은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상당기간 읽어야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얼마 전 도서관에서 누군가 반납한 책 무더기 제일 위에 올려져 있던 ‘마치우시 왕 1세’를 발견했다. 야누쉬 코르착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그 책 제목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내 눈앞에 바로 놓여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마치우시 왕 1세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꼬꼬마 왕이 된다. 그를 무시하는 신하들, 이웃나라들마저 마치우시 왕을 깔보고 쳐들어 오는데 이 대담하고 용감한 꼬마 왕은 아무도 몰래 백의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까지 하여 금의환향하게 된다. 그렇게 어리지만 자신을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한 마치우시는 어린이의 입장에서 어린이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자 하는데, 작게는 초콜릿을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회전목마를 공원마다 세워주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어린이 국회를 만들어 어린이의 의견과 필요들에 귀를 기울이고 어린이들의 세계는 어린이들이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코르착도 그렇게 고아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하지만 적군의 스파이가 잠입하여 그 속임수에 넘어가는 바람에 크게 잘못된 법을 제정하게 되는데, 모든 어린이들과 어른들의 직책을 바꾸어 살아야 한다고 공표하고 만다. 어른들은 모두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일을 맡게 되는데 그 바람에 나라의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어 버린다. 책임감 없고 방종한 어린이들의 행동으로 철도와 군대와 경제와 산업들이 올스탑 된 것이다.
이 책은 꽤 두껍다. 긴 호흡 내내 마치우시가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 자세히 묘사되므로 그리고 그의 성장이 꽤나 기특하고 따뜻한 방향으로 흘러가므로 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틀림없이 마치우시가 꿈꾸던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그의 유토피아가 완성되어 훈훈하게 마무리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나의 기대는 크게 어긋났다. 마치우시는 어른과 어린이의 역할을 바꾸는 바람에 생긴 혼란과 무질서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쳐들어온 이웃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지고 만다.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마지막에 풀려나 무인도로 갇히게 되는 판결을 받는 것과 함께 이 책은 끝난다. 너무나 현실적인 마지막을 보면서 어린이 책이라는 이유로 ‘.....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의 끝맺음을 기대했던 나의 바람이 너무 나이브한 것이었구나 생각했다. 야누쉬 코르착은 이 책을 통해서 그저 헛된 희망이나 곧 사라질 미지근한 온기를 사람들에게 주고자 이 책을 쓴 것은 아닌 듯했다. 마치우시가 많은 조언을 얻고 진심으로 따랐던 이웃 나라의 ‘슬픈 표정의 왕’은 개혁자 마치우시 왕에게 말한다. “친애하는 마치우시, 정말 용감하게 시작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개혁이에요.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잘되고 있고, 사실 아주 훌륭했어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개혁은 힘든 노력과 눈물과 피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앞으로도 항상 이렇게 잘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자기 자신의 능력을 너무 믿어서도 안 되고요.”
세상을 1mm 바꾸는 건 그렇게 힘든 일이다. 개혁을 하고자 하는 모든 의도와 그를 위한 시도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아름다워도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게 되어 있으며, 그는 어떻게든 개혁을 폄훼하고 짓밟기 위해 교묘히 방송매체를 이용하고 여론을 조작하여 개혁자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군중들을 이끌어 간다.(마치우시 왕국에서도 어김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불합리한 것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과 그것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첨예한 대립이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세상이 불합리하다 이렇게 바꾸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과연 옳은 것들인가도 의문이다. 마치우시는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며 어린이들만의 세상을 만들면 어른 중심인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은 어린이들이 모두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른들을 배제한 어린이들만의 세상이 몰락하고 마치우시 왕국마저 사라짐으로써 그의 주장은 결국 옳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다.(어린이들의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어른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코르착은 말하고 싶은 듯하다. 슬픈 표정의 왕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어른이면 더 좋겠지) 옳고 그르다는 것이 당장 판명 나지 않는 것이 역사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 앞을 내다보고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왜 세상이 빨리 바뀌지 않냐고 조급하게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므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애쓰는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분들은 아마 온 힘을 다하고 끝없이 노력해도 실패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개혁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말이다. 야누쉬 코르착은 이렇게 이 이야기를 끝맺는다.
'무인도에서 마치우시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게 되는 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게요'
그는 오래전에 고아들과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했으므로 그가 생각해 놓았던 마치우시 왕의 다음 이야기를 우리가 들을 기회는 없다. 하지만 나는 마치우시가 이대로 죽지 않았다는 걸, 무인도에서 오히려 더 멋진 청년으로 자라 결국은 성공한 ‘개혁자 마치우시 1세’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는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길 바라게 된다.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