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철저히 고독하게 통과하는 길

by 청량음료

오래 알고 지내온 지인의 소식을 들었다. 오래전 나의 아버지의 부고를 알려 드렸던 분이었다. 그때 그분이 나에게 보내신 문자 메시지를 기억한다.

‘아버지의 천국 입성을 축하한다.’

죽음이라는 상황에서 ‘축하’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고 또 ‘축하’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그 당시 아버지의 연세가 너무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평소 나를 아껴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알기에 다소 쿨하게 느껴지는 그분 나름의 위로구나 했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르고 우리는 드문드문 서로 소식을 나누었다. 그분은 그동안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두 손주의 할머니가 되셨다. 꽤 오래 근황을 주고받지 못하다가 최근에 그분께서 코로나에 걸리셔서 사경을 헤맸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다소 쉽게 지나간다는 오미크론이 나오기 한참 전,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때였다. 배가 갈라지듯 아팠다고 했다. 병원에 누워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두려웠다고 했다. 태어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아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먼 곳에 사는 손자를 보고 죽어야 할 텐데 생각했다고 했다. 살아남기 위해, 독한 약을 견디기 위해, 꾸역꾸역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고 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다행히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난 왜 16년 전 그분이 나에게 보내셨던 메시지가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그분이 젊고 건강하고 모든 일에 자신만만할 때셨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분은 일을 참 잘하는 분이셨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해야 맞는 것인지를 정확히 하는 분이었다. 게다가 마음도 따뜻하고 다정하고 공정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분을 좋아하였다. 그런데 아마.. 이런 말을 하기는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 당시의 그분은 인생의 어려움이랄까.. 큰 상실이랄까.. 그런 일들을 겪어 본 적은 없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의 천국 입성을 축하한다라는 말은 진심으로 나의 상실을 이해해서 나왔다기보다는, 아마 친분 깊은 한 학생의 커다란 비극에 대해 마음이 아파 (머리로 이해될 만한 범위 안에서) 그분 나름의 위로를 건네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분을 탓하는 건 전혀 아니다.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는 백 프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나고 보니 천국 입성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는 참 좋고 소망이 되는 말이지만, 천국 입성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이 당사자와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실과 아픔을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쉽사리 ‘축하’라는 말을 꺼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실 죽음에 대해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건강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종종 시달렸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잘 갔다. 그렇긴 해도 건강하지 못해 죽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했지만 죽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엔 그것은 너무나 추상적이었다. 가까운 이들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는 그 건널목이 어떤 길인지 모르기에 두려웠다. ‘죽음’이라는 막연한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죽음의 추상성은 나에게 여전했을 거다. 그런데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랑하는 이를 죽음의 길로 떠나보내는 자로서 생의 길에 남아있는 자가 되어보니, 동일한 경험을 했던 그리고 앞으로 해야만 할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 마음의 지경이 넓어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지경이 넓어지는 길이 얼마나 가시밭길이던지 깨어진 유리조각이 가슴속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오롯이 견뎌내어야만 했다. 10년 이상을 말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의 집을 향해 그 건널목을 걸어가는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속물적인 한 인간의 이야기이다. 그는 겉으로 보았을 때는 비교적 성공한 삶을 살아왔다.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착실한 학창생활을 거쳐 성공적인 직장생활에 승진을 거듭하며 살아온다. 적당한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두 자녀도 얻는다. 불편한 일은 적당히 피해 가면서. 성공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오고 있던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닥친다. 시작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옆구리를 조금 세게 부딪혔을 뿐이었다. 새로운 직장, 멋진 새 집, 새 가구.. 새 생활이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집에서는 마누라의 불편한 잔소리나 짜증은 슬쩍 피해 가되 직장에서는 능력껏 최선을 다해 일하면 빠른 승진, 다른 이들의 인정쯤은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날 갑자기 떠밀리듯 죽음을 향해 뻗어있는 길을 걸어가게 된다. 급격히 나빠지는 자신의 몸 상태를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마구 떠밀고 가고 있는 거센 물결을 어떻게든 피해보고자 발버둥을 친다. 자신은 괜찮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 위안해 보기도, 직장일에 몰두함으로 고통을 외면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는 기분 나쁜 통증은 그의 모든 의욕을 앗아가 버린다. 처음 겪어보는 두려움 앞에서 사람은 올바른 판단을 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허둥지둥하기가 쉬운데 이반 일리치도 마찬가지였다. 주치의를 정하여 제대로 치료를 지속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여러 의사들을 전전하다가 점점 치료시기를 놓치고 상태를 악화시킨다. 무엇보다 그에게 일어난 가장 큰 비극은 그 누구도 그의 두려움과 끝없는 통증으로 인한 고통,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자초한 면도 있었다. 가족이라 할지라도 평소에 사이가 좋고, 따뜻한 대화가 오고 가고, 사랑으로 뭉쳐있었다면 위기의 상황에서도 더 많은 위로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분위기가 좋을 때는 남편 노릇 아빠 노릇 가장 노릇을 하였으나,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이 올 때는 여지없이 그 상황을 외면하고 자신의 일에만 틀어박힘으로 문제를 회피했다. 자연히 아내와도 딸과도 사이가 소원해졌다. 냉담하고 가느다란 부부의 연, 핏줄의 연으로만 묶여 있었을 뿐이었다.


소중한 사람이 영원히 떠나고 나면 그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죄책감으로 마음이 뒤엉키게 된다. 이반 일리치의 가족들은 어땠을까. 그의 육체적인 아픔, 외로움을 알아주지 못했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건네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후회했을까. 그의 신경질과 짜증과 화가, 앞으로 닥칠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지금 현재 자신을 못살게 구는 육신의 고통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뒤늦게라도 깨달았을까. 그래서 조금 더 참아주고 품어줄걸 한탄했을까.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제때에 올바른 행동을 하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이다. 속 아픈 그를 위해 갖가지 죽을 끓여 드릴걸, 산책과 등산에 동행해 드릴걸 그래서 너무 짧게 끝나버린 이 땅에서의 함께함에 대비하여 그와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누어 마음에 더 담아놓을걸, 불합리한 언행을 하실 때도 공포에 사로잡혀 흔들리는 마음에서 기인했었다는 걸 조금이라도 알아드릴걸, 그래서 그럴 때마다 같이 성질을 내거나 냉랭해지지 않고 좀 더 평온하게 그를 대할걸. 이반 일리치의 아내와 딸도 나처럼 그렇게 후회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남편, 아버지의 고통에 조금도 잘못이 없었다 하더라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반 일리치의 언행을 그렇게 잘잘못을 따져 판단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했을까.


안타까운 것은 이반 일리치가 생전에 가족들과의 애정을 쌓아갈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사후에 열린 장례식에서 보인 가족들의 냉담한 행동을 보면 이반 일리치의 평소 언행이 얼마나 가족들에게 상처를 남겼는지를 그래서 아내와 딸의 마음에는 남편을 아버지를 애도하기조차 어려워졌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마저도 병든 이반 일리치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그가 죽고 나면 그가 차지하고 있던 직장의 좋은 자리는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나에게 돌아오지는 않을까 기분 좋게 상상해볼 뿐이다. 사이가 나빴던 직장 내 정적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마고우마저도 우울한 병문안 혹은 장례식 방문 후에는 기분을 상쾌하게 하기 위한 카드놀이에 몇 시에 참가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친구가 좀 안됐긴 했지만 나에게는 닥치지 않을 불행이고 닥치더라도 아주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을 향한 이반 일리치의 고독한 두려움을 이해했을 뿐 아니라 이반 일리치에게 닥친 죽음이 어느 누구에게는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는 일이므로 그를 위로하고자 했던 유일한 사람은 집안의 하인인 게라심 뿐이었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이반 일리치의 변기를 닦아주었을 뿐 아니라 밤이 새도록 이반 일리치의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이반 일리치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기꺼이 도와준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에 대해서 털어놓고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싶었던 이반 일리치는 오직 게라심에게만 그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다. 가까운 이가 옆에 있어도, 그들과 이 땅을 살아갈 때 운 좋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영원한 집에 입성하는 과정은 철저히 고독자로 통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천국에 입성하는 과정 중에 있든, 사랑하는 그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입장에 있든, 나중에 후회함이 없도록 제때에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누군가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입장이라면 그를 위해 죽을 끓이고, 평온하게 대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자주 함께 산책을 하겠다. 내가 천국으로 입성하는 입장이라면 진심 어린 위로와 돌아봄을 받고 싶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동안 게라심에게서만 위로를 받는다면 너무 슬플 것이다. 평소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잘 대함으로 나의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낯빛을 보이지 않겠다. 고맙게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준다면 그들을 평온하게 대하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했는지 이야기하겠다. 그러나 남겨질 이들이 너무 고생하지 않도록 천국으로 건너가는 그 길을 오래 걷지 않기를 바란다. 이반 일리치와 같이 영혼이 떠나가는 그 순간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젖어 죽음의 존재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지 않게 되기 바란다. 오직 영원한 기쁨만이 존재한다는 그곳으로 마침내 떠날 날이 다가왔다는 행복에 젖어 환희의 송가를 부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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