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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Jan 13. 2023

다섯째 아이

행복한 가정이라는 허상

내 주변에는 아이가 넷 있는 집이 한 가정 있는데 이는 내가 아는 주변인들 중 가장 다자녀에 해당한다. 바로 나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가정이다. 동생부부가 자녀 계획이 둘 이상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셋이 한계치라고 생각했지 요즘 시대에 드문 넷까지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은 세상에 잘 태어나 아주 예쁜 6살 어린이가 되었지만 네 번째 조카가 아직 여동생의 뱃속에 있을 때 우리 집안은 여러모로 시끄러웠다. 먼저 그 사실을 안 엄마가 이민을 가겠다고 나섰다. 동생의 시부모님은 제부가 어렸을 적 모두 돌아가시고 우리 집도 아빠가 안 계셨기에 네 분이 계셔야 할 집안 어른의 자리에 엄마 혼자 앉아 계셔야만 했던 그 중압감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아이를 가진 동생에 대한 노여움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풀지 않았던 엄마의 모습에 나도 속이 상했었다.


그렇게 소요를 일으키긴 했어도 얌전히 엄마 뱃속에 잘 있다가 건강히 태어났으면 좋았으련만,  임신 24주쯤 되었을 때 조산의 조짐을 보였다. 태어나기엔 일러도 너무 일렀으므로 동생은 세 아이를 집에 둔 채 혼자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당시 셋째 조카가 3살이었으니 병원에 들어간 동생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고, 아이들을 건사해야 했던 엄마와 제부도 보통 수고가 아니었을 것이다. 부산에 사는 친정 가족과는 달리 나는 서울에 살고 있었으므로 발만 동동 구를 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없는 실력을 끌어모아 국과 반찬을 만들어 택배로 가끔 보낼 뿐이었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던 막내 조카는 기특하게도 끝까지 잘 버텨서 무사히 세상 밖을 나왔다. 지금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어른들이 왜 그렇게까지 난리였을까 미안해진다.




어느 날 여성 작가들에 대한 책을 읽다가 ‘도리스 레싱’이라는 여성작가에 알게 되었다. 그녀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던 중 ‘다섯째 아이’라는 책을 발견하고는 그 제목에 끌려 책장을 펼쳤다.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강렬한 이야기에 단숨에 그 책을 읽었다. 책장을 덮으며 아주 긴 한숨이 나왔다.


1960년대 영국이 배경이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이라고 하는 두 남녀가 직장의 파티에서 만났다. 그들은 서로에게 처음 보는 순간부터 빠져들었고 곧 결혼한다. 그런데 그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퇴보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보수적이고 답답한 사람. 수줍고 비위 맞추기가 어려운 사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지만 그 외에도 그들에게는 좋지 않은 형용사들이 끝없이 붙어 다녔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생각을 완강하다고 할 수 있으리만치 옹호했다.

또 하나 그들의 결혼에 대한 목표도 희한하리만치 똑같다. ‘커다란 집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아 그들이 왁자지껄 활기차게 뛰어놀게 하고 그 집에 친지들이 자주 놀러 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 생활의 모습이자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그들의 인생 목표에 충실하다. 먼저 그들의 형편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감당할 수도 없는 빅토리아풍의 대저택을 데이비드 아버지의 금전적인 도움을 받아 구입한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첫 아이를 가진다. 아이를 낳고 몇 개월 되지 않아 또 둘째 아이를 가진다. 그러는 사이 연휴 때마다 그들의 커다란 저택에는 친척들이 몰려와 흥겹게 시간을 보낸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자신들이 가꾸어 놓은 성에 기꺼이 사람들이 찾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에 매우 흡족한 미소를 보낸다. 셋째 아이를 낳는다. 둘의 부모님들이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너무 연달아 아이들을 낳다 보면 부부의 개인적 삶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에 따른 어려움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고. 해리엇의 친정엄마 도로시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움켜쥐려고 서두르는 것 같다며 충고한다. 하지만 부모님들의 일리 있는 걱정도 그들에게는 귀찮은 잔소리였으며 자신들의 행복한 성을 파괴하려는 방해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어머니는 모성애가 없어서 그렇다고. 해리엇은 모성애라는 것이 있다고. 그리고 넷째 아이를 낳는다. 친척들이 찾아올 때마다 해리엇은 임신 중이었다. 그리고 세 아이의 육아로 늘 피곤하고 지쳐있으므로 친척들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하기 어려웠다. 슬슬 친척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넷째 아이를 낳자 모두가 말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그리고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다섯째 아이를 낳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행복의 성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많은 자녀들이 왁자지껄 함께 성장하고 그들의 대저택은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그런 성. 만약 그 두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견고한 성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면 누가 뭐라고 했겠는가. 아이를 낳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우주가 동원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밥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하는 노동뿐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참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행복’을 찾아 아이들을 낳는 동안 해리엇의 엄마 도로시는 자신의 큰딸과 그 아이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다. 부자인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물주가 되었다. 대저택을 살 때도, 그 이후에도 시시때때로 그는 수표를 건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는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큰돈을 스스럼없이 써댄다.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났다. 그 아이는 그들의 앞선 자녀들과 다르다. 뱃속에서부터 ‘자신의 배를 칼로 갈라 그 아이를 꺼내고 싶을’ 만큼 태동이 너무나 심하다. 잠을 잘 수도, 일상을 살아갈 수도 없을 만큼 심한 태아의 움직임에 해리엇은 남몰래 진정제를 삼킨다. 진정제를 삼키면 아이의 움직임이 둔해져서 잠을 잘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약 효과가 떨어지면 다시 시작된다. 드디어 아이가 태어났다. 신생아를 안아 본 모든 지인들은 흠칫 놀라다가 이내 엄마에게 아이를 돌려준다. 꼭 도깨비나 요괴 같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아이로 인해 그들만의 견고한 성은 금이 간다. 아기인데 고양이와 개를 목 졸라 죽인다. 다운증후군인 사촌누나마저 그의 표적인 듯하다. 표정이 없고 아이 같지 않다.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친척들의 발길이 점점 뜸해진다. 그 사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던 넷째 아이 폴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다루기 어려운 아이로 변했다. 다른 세 아이도 점점 침울해진다. 엄마는 벤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벤이 유일하게 따르는 동네 불량배들에게 돈을 주어가며 벤과 어울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때부터 벤은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거리를 쏘다닌다. 위의 큰 아이 둘은 자랄수록 점점 할아버지댁, 할머니댁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너무 많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데이비드는 쉴 틈 없이 일해야만 한다. 어깨가 너무나 무겁다.


애초에 그들이 그리던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허상이다. 모래 위에 세운 성이다. 많은 아이를 낳아 큰 집에서 뛰어놀며 자라게 할 것이 아니라 아이를 몇 명을 낳든 두 부부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두 사람의 힘으로 키울 수 있을 만큼의 아이를 낳아 그 아이들이 엄마아빠의 사랑을 듬뿍 느끼며 자라게 하는 것이 옳았겠다. 될 수 있는 한 자주 친지들이 집을 찾아오게 하여 그들을 대접하며 우월감을 느낄게 아니라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경제 상황을 파악하여 규모 있는 살림살이를 하며 가계 경영을 잘해 나가는 것이 먼저였겠다. 그들만의 행복을 위해 여기저기 손을 벌리지 말았어야 했으며 그 요청에 응해준 고마운 도움의 손길을 당연시 여기면 안 되었겠다.


내가 생각했을 때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이들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완고함이다. 또 문제 상황이 되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들만의 ‘행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희생시킨다. 아이를 많이 낳는 행복을 위해서 스스로를 잘 돌보지도 못할 아이들을 많이 낳아 정작 육아의 많은 부분은 친정어머니가 감당하게 할 뿐 아니라 벤 때문에 상처받고 돌봄을 받지 못한 네 명의 자녀들을 품어주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행복을 실현시킬 장식품에 불과해 보인다고 표현하면 너무 냉혹한가.


해리엇은 그들이 불행해진 이유가 자신들이 감히 행복해지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이 불행해진 이유는 행복이라는 정의를 처음부터 잘못 내렸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까지 완고하게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던 철부지였기 때문이다. 사실 타고난 성향이라는 것도 있어서 벤이 정말 소시오패스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건 부모들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이렇게까지 혹독하게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행복만 생각했을 뿐 다른 사람의 행복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동생과 제부는 네 명의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여 오랜만에 조카들을 보니 이 아이들이 얼마나 엄마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라고 있는지 느껴졌다. 네 아이를 낳느라 9년을 휴직한 후 2년 전 복직한 동생은 맞벌이를 하면서도 아이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있었다. 분명 말도 못 하게 바쁘고 피곤하고 힘들겠지만 내가 왜 애를 넷이나 낳아서 이 고생인가 하는 넋두리 따위는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자신들을 찾아온 제각기 다른 생명들을 하나하나 잘 돌아보고 있었다.


사실 어떤 아이가 내 아이로 올 지 알 수 없다. 창피한 일이지만 나는 두 아들을 키우면서 나 자신이 아이를 잘 키울 깜냥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육아가 너무 버거워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굳이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우리 두 아들은 지극히 정상이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인데도 그러했다. 아마 많은 부모들이 나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어떤 아이가 내 아이로 오든 의 잘못은 하나도 없으므로, 이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 내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옳겠다. 결국 내 아이가 행복해야 나도 온전히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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