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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Jan 10. 2023

미망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이야기

한국학교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역사 이야기를 조금씩 해주고 있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이야기를 시작으로 연산군, 영조와 사도세자, 독립운동가 이회영, 박상진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의 반응이 좋았다. 학교 다닐 때 역사를 좋아해 본 적은 없었지만, 작년에 가르치던 학생들 중에서 역사를 배우지 못해 아쉬웠다는 반응이 나와 그 부채감에 올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는 조금씩이라도 한국 역사에 대해 알려주자는 마음을 먹었더랬다.

학창 시절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한 것과 아무도 시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는 흥미와 집중 면에서 비교할 수없이 차이가 많이 났다. 유튜브에서 역사 전문 채널을 구독하고 우리 집 어린이들이 보는 위인전을 찾아보기도 하고, 예전에 사 두었던 역사책을 읽어보기도 하면서 나의 지식도 채워나갔다.(도대체 나는 역사시간에 뭘 배웠던 건지..)


그러다가 국어수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제 강점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나 소설 등이 쓰인 시대 배경이 일제 강점기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 시와 소설들의 저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대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역사이야기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하자 싶어 책이나 유튜브 강의를 열심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공부하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새삼 가슴으로 다가오는 바람에 혼자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해방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나 가슴 절절히 느끼며 내가 알고 느낀 사실을 우리 반 학생들에게 알려주려 노력했다.




한국학교 교무실 한편의 책장에서 박완서의 ‘미망’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대출도 해 주신다기에 믿고 보는 박완서 씨의 소설이라 기꺼이 두꺼운 두 권의 책을 빌렸다.

구한말 개성의 거부 전처만의 이야기에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개성은 현재 북한땅으로 편입이 되어 있어 그런지 고려시대의 수도였고 인삼이 유명했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니 개성 사람들은 고려시대에 대한 향수로 인해서 오랜 세월 이 씨 조선에 대한 증오심에 가까운 악감정을 품고 있었고, 인삼 산업과 해외를 아우르는 무역업을 통해서 그들만의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 당시 개성 무역의 중심에 서 있던 소설 속 인물이 전처만이다. 그는 아주 가난한 중인 출신이었으나 양반에 대한 복수심을 동력 삼아 결국 거부가 된다. 그런 그가 가장 아꼈던 사람은 손녀 태임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태임이의 아버지이자 전처만의 큰아들은 젊어서부터 병약하여 결핵(혹은 폐병)을 앓았는데, 전처만은 곧 죽을 아들의 후손이라도 잇고자 그 사실을 숨기고 가난한 집의 딸을 데리고 와서 태임을 낳고 아들은 곧 세상을 떠난다. 태임의 어머니인 머릿방 아씨는 과부가 된 후 오랫동안 집안의 차가운 그림자처럼 살아가다가 오랜만의 친정 나들이에서 젊은 하인과 하룻밤을 지낸 후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으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어머니의 복수로 자궁이 몸 밖으로 빠지는(끔찍하다ㅠ) 일을 당한 후 시어머니가 아끼던 우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며느리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진 전처만과 그의 부인 홍 씨는 죽은 며느리의 환영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으므로 태임은 천지간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총명함으로 선대의 커다란 집안 살림을 도맡아 가며 잘 건사하여 전 씨 집안을 세워나간다.


대하소설답게 이 책에서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라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자신들이 결정한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누군가는 독립운동을 위해 한반도를 떠나고, 누군가는 일제에 편입하여 승승장구하고, 누군가는 태어났을 때부터 일본의 치하에 있었으므로 이 시대, 이런 분위기가 너무 당연하여 어떤 역사적 의식 없이 동화되어 일본인처럼 살아가는 인물들도 있다. 일본사람보다 더 일본인으로 살았던 한국인들과 어떠한 저항 없이 일상을 평화롭게 살아갔던 한국인들은 별다른 고생 없이 삶을 영위한다. 그리고 참 마음 아프지만 잘 알려진 대로 빼앗긴 조국을 위해 헌신하였던 한국인들은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누구를 중심으로 이 시대를 풀어볼까 고민하다가 김구 선생님에 대해서 알아보자고 결정했다. 누구나 김구 선생님의 얼굴을 알고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수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얼마의 기간 동안, 어디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기 앞서 내가 먼저 김구 선생님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넘어서서 한 인간에 대한 경의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김구 선생님과 함께 했던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이야기를 보며 혼자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다. 한편 수많은 의로운 우리의 선조들이 걸었던 독립운동이라는 길이 때로는 얼마나 궁색하고 초라하고 심지어 구질구질하기까지 했을까 생각했다. 1919년 3.1 운동의 열기와 함께 호기롭게 해외로 떠나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그들. 3.1 운동에서 목격한 우리 민족의 호응과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독립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많은 수의 의로운 부자들이 독립자금을 보태었을 것이고, 많은 뜻있는 동지들이 모여 속히 독립을 이루어내어 보자고 의기투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많은 똑똑한 이들이 모이는 바람에 서서히 의견들이 갈리기 시작했을 것이고, 때마침 불어왔던 사회주의 사상의 물결에 편승한 독립 운동가들과 민족주의 사상을 내세운 독립 운동가들의 파로 나뉘기 시작했을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우리나라와 일본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이권이 개입되어 여러 나라들이 얽혀있는 문제라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앞날이 묘연해 보이는 독립에 지원금이 계속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한 목표아래 모였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뿔뿔이 제각각 흩어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쇠락하여 간판만 걸려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켜낸 분이 김구 선생님이다. 그는 끼니를 이을 돈이 없어 늙으신 어머님이 시장 바닥에서 주워오신 배춧잎으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결국 어머님과 두 아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내어야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1932년 이봉창 의사의 수류탄 의거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그 이후 이어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 그로 인한 장제스와의 만남, 장제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한국광복군 창설, 역시 장제스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의 자발적 독립을 약속받은 카이로 회담 등 그의 인생 이야기는 그 자체로 드라마이다.

그중에서 난 1931년까지 아무것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김구 선생님의 그 시절에 가장 마음이 갔다. 얼마나 떠나고 싶었을까. 얼마나 비참했을까. 얼마나 다 그만두고 싶었을까. 엉덩이가 가볍고 생각이 가벼운 나 같았으면 12번도 더 떠나버렸을 텐데.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태임의 동생 태남 이야기이다. 태임과 태남은 그 시대 극히 드물고 터부시되었던 아버지가 다른 이부 남매인데,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망나니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낸 태남이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고, 친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변화되게 되고, 학교에서 독립운동가 진동열 선생님을 만나 그를 깊이 사모하게 되고, 그를 만주로 떠나보낸 후 내내 그리워하다가 운명처럼 진 선생님의 딸 달래와 만나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 만주로 떠난 달래를 뒤쫓아 만주로 가서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아름답게,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그런 남동생을 기특하게 여긴 누나 태임과 매형 종상은 거금을 독립자금으로 내어놓으며 독립운동을 돕는다. 그러나 결국 독립운동가의 운명은 평안하지 못했다. 만주 지방을 덮친 일본군에게 장인이자 은사인 진동열 선생님이 죽임을 당하고, 그 죽임을 당한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시신을 보았던 선생의 딸 달래가 정신 이상을 일으키면서 태남의 가정에 불행이 깃든다. 버팀목이었던 진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아내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는 등, 불행이 계속해서 그를 덮쳤으나 태남은 독립운동의 길을 떠나지 못한다. 장인어른이 하던 사업을 이어가려 자금을 요청하고 동분서주한다. 그러나 결실은 없다. 꼭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만 같다.


아마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도 그러했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고, 서로 싸워댔을 것이고, 돈은 또 여기저기 쓸 곳이 많았을 것인데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서 참혹하게 죽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 곁에도 죽음이 늘 가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독립운동을 했겠구나.  구질구질함을 견뎌가며 그렇게 독립운동을 했겠구나. 어떨 때는 내가 독립운동을 다는 사실조차 의심이 들었겠구나. 태남의 이야기를 보면서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신산했던 삶이 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과 역사의 흐름 덕분에 우리는 독립을 했고, 지금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김구 선생님이 꿈꾸던 아름다운 문화 강국을 이루어 내었다.


여담이지만 이 소설은 내가 사랑하는 또 하나의 책 박경리의 ‘토지’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대적 배경도 그렇고, 여주인공이 몰락해 간 집안을 불굴의 의지로 다시 살려내는 점도 그렇고, 남편감도 자신보다 신분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스스로 골라(!) 좋은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습도 그렇고, 그녀들이 했던 고민들도, 역사의 격랑에 따라 흘러갔던 운명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난 토지의 서희도, 미망의 태임도 참 멋있는 여성들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과거에 매여있지 않고 시대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갔던 여성들의 삶을 훔쳐보는 일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독립된 조국에서 평화롭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모든 독립운동가들께 감사와 존경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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