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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량음료 Jan 16. 2023

인생 드라마

드라마에서는 가끔 이런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5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공항의 출국 게이트가 비춰지고 자동문이 열리며 주인공이 5년 전에는 없던 어린이 하나를 데리고 나온다던지, 또는 아주 어린 꼬마 하나를 데리고 떠났던 주인공이 훌쩍 큰 그 아이를 데리고 다시 등장한다던지 하는. 5년 간 그 주인공이 어떤 시간을 지지고 볶으며 살아냈는지는 다 생략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저 그 결과물인 더 세련되게 바뀐 외모, 자라난 자녀 등만 비춰질 뿐.


결혼 직후 주재원이 된 남편을 따라 간 러시아에서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을 혼자 키우는 시간들이 너무나 지루하고 힘들 때 가끔 드라마와 같은 상상을 했다. ‘몇 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인천 공항 게이트가 열리며 훌쩍 자라난 건이 완이와 함께 우리가 등장하고 마중 나오신 시부모님을 반갑게 만나는 상상. 그 몇 년의 시간이 건너뛰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지루한 일상의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견뎌내고 그 시간들이 알뜰히 모여서 아이들이 자라고, 그 후에야 몇 년 후 인천공항에서 시부모님과 만났다, 당연하겠지만.



핸드폰의 사진첩을 뒤져보다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아마 이 사진은 내 핸드폰으로 그 당시 4살 무렵이었던 큰 아이가 찍었을 것이다. 사진 속의 나는 젊었으나 기진맥진하여 소파 위에 누워있다. 저 빨간 소파는 집주인의 것이었는데 엄청 크고 또 가죽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정말 편했던 기억이 난다. 소파 바로 아래는 이불이 깔려있다. 밤새 소리 지르며 울어대는 둘째 아이 완이 때문에 방에서 자지 못하고 거실에 나와 완이와 함께 자며 함께 밤새 씨름했을 것이다. 한의학적으로는 ‘야제증’ 증상을 보였던 완이는 태어난 이후부터 4살 초반이 될 때까지 밤마다 자다가 소리를 지르고 울어댔다. 겨우 달래면 자다가 또다시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밤새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 아침이 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어나 천사같이 예쁘게 놀았다. 하지만 밤만 되면 악마같이 돌변하여 소리 지르고 울어대기를 몇 년간 반복하다 보니 나는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큰아이 때문에 낮잠도 잘 수 없었다. 밤에 자기 전에 늘 기도했다. 우리 완이 오늘 밤에는 꼭 잘 자게 해 달라고. 하지만 나에게 3년 이상 예정되었던 시련은 꽤 오랜 기간 끝나지 않았다. 소리 지르는 완이 때문에 겨우 든 잠에서 깨어나면 극심한 피로를 느끼며 생각했다. 사람이 이렇게 피로해도 안 죽을까?

돌이켜보면 들끓는 용광로를 통과하는 것만 같던 시절이었다. 해외에서 도와주는 이 없이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현실이 아니길 바랐던 시간 속에서 드라마 같은 현실을 상상해 보는 것이 아주 조금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불구덩이 같은 시간을 건너뛰어 5년 후라는 자막이 내 인생 드라마에서 찍히길 상상했다. 오랜 상상 끝에 결국 우리는 주재기간을 끝내고 조금 자란 두 아이와 함께 인천공항의 입국게이트를 통과했다.



다시 나의 인생 드라마에는 ‘5년 후..’라는 자막이 찍히고, 이제는 훌쩍 커버려 각자의 가방을 씩씩하게 멘 건이완이와 인천공항 출국장을 통해 사라지는 장면이 나왔다. 그 5년 동안 드라마에서라면 마땅히 생략되었을 한국에서의 지루하고도 귀한 일상이 하루하루 모여 아이들은 자랐고 나는 늙어갔다. 4살, 7살이었던 아이들은 9살, 12살이 되었고 나도 마흔을 넘긴 중년이 되었다. 이번에도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인해 독일로 출국하는 비행기 안으로 우리들은 사라졌다.


다시 나의 인생 드라마에서 ‘몇 년 후’라는 자막이 찍히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독일에서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알콩달콩, 때로는 지지고 볶으며. 이번에는 밤마다 소리를 질러대는 아기가 우리 집에는 없지만 대신 머릿속이 안개에 휩싸인 청소년이 있다. 그를 잘 선도하여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이번 드라마 뒤 속사정이다. 그런데 마땅히 바른길로 인도해 주어야 할 엄마 또한 모지람 투성이 이니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다. 잘 해결되길 바라고 있다.



만약 정말로 우리 인생에서 cd를 틀 때와 같이 트랙조정이 가능하다면,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시간의 트랙을 버튼 하나로 건너뛸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과연 실제로 그 버튼을 사용할까. 둘째 완이가 밤마다 소리 지르고 있었을 무렵, 그 곁에 누워 정말 지옥 같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메피스토펠레스가 버튼을 누르라며 내 귀에 속삭였다면 난 파우스트와 같이 유혹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런 버튼도, 유혹자 따위도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흔한 말로 고통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고 하는데 그 흔한 말이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가지고 과거로 갈 수 있는 버튼이 있다면 난 기꺼이 우리 큰 아이 건이가 태어나던 날에 맞추어 그 버튼을 누르겠다.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고 덜 실수하고 싶다. 다시 용광로 같은 시간에 들어갔다 나와야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내가 우리 두 아들들과 울고 웃었던 시간들을 통째로 앞으로 건너뛰는 실수는 결단코 하고 싶지 않다.



우리 인생은 드라마가 맞다. 단지 희로애락의 순간을 16시간에 모두 담는 드라마는 시간과 사건이 압축되어 보여지므로 더욱 극적이고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 평균 80년 동안 방영되는 드라마 속에 우리 모두는 살아가고 있으므로 기쁨과 행복의 순간은 매우 짧게 그 외의 시간은 지리멸렬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나의 인생 드라마는 언제 종영될까. 나는 내 드라마는 딱 80년 동안만 방영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더 일찍 종영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내가 80쯤 되면 우리 두 아들도 중년을 넘겨 안정될 테고 사랑하는 나의 남편과도 큰 여한 없이 인생을 함께할 수 있었을 듯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해 새로운 소망이 생겼다. 내 인생 드라마가 언제 종영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내용이 조금 더 발랄, 상쾌, 유쾌, 통쾌, 씩씩하게 그리고  좀 더 길게 방영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내 안에 생겨나길 바란다. 이 땅에서의 내 삶이 재미있고 즐겁고 좋아서, 아, 지구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내 인생드라마가 조금 더 연장되길 바라는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생겨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인천공항 입국 게이트가  열리고 입국장으로 들어서는 우리 가족을 카메라가 비춰주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 부부는 더 나이가 들었고 건이완이는 멋진 청년들이 되어가고 있겠지. 나의 인생에서 다시 인천공항 출국게이트로 우리 가족이 사라질 날이 또 올까. 아니면 이제는 해외로케이션 없이 한국에서만 촬영을 하게 될까. 나도 궁금하다. 그리고 이제는 국내촬영만 좀 하고 싶다는 생각도 슬슬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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