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객에게 작업 문의가 들어왔다. 평소와 같은 디자인 의뢰 문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디자인이 아니라 인쇄만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종종 그런 고객들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다른 곳에서 디자인을 맡기고 인쇄가 더 싼 곳을 찾아 따로 맡기려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고객이 보내준 디자인을 보고 나는 멈칫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결코 디자이너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허접한 디자인이었다. 보자마자 알았다. AI툴을 썼구나. 챗지피티인지 제미나이인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에게 부탁한 결과물이구나. 그래서 인쇄용으로도 적합하지 않은 화질의 파일을 나에게 보낸 것이구나.
하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을까. 결국 나는 이미지 화질이 낮으면 인쇄할 때 인쇄물의 이미지가 깨져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인쇄를 진행했다. 고객은 내 경고에도 아랑곳 않았다. 디자이너의 미감 같은 건 필요 없는 듯했다. 그저 들어갈 내용만 들어가면 AI에게 공짜로 받아낸 파일도 크게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 이전에도 수많은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이 사실 디자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AI가 만들어낸, 아직 완벽하지 않은, 구리디 구린 결과물도 괜찮은 거구나. 그래. 무료였거나 디자인비보다 훨씬 싼 월 구독료를 내고 받아낸 결과물일 테니 가성비 넘치는 건 분명했다.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이 볼 때 폰트며 이미지 배치며, 그런 디테일이 다 무슨 상관일까.
AI로 세무사가 일자리를 잃었다는 다큐를 보게 되었다. 신규 세무사들이 일할 자리가 없다고. 미국에서는 더욱더 빠르게 인력들이 대체되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디자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도비 콘퍼런스에서는 해마다 놀라운 AI 기능들을 발표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디자이너들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홍보하는데 정작 나는 그 발전들이 도대체 언제까지 인간을 필요로 할까 생각했다. 아직까진 필요하겠지. 아직까진 유용하겠지. 하지만 몇 년 후면 디자이너와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의 경계가 사라지지 않을까. 광고문구가 들어가면 만사 오케이인 고객들에게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은 것만 같은 결과물을 전달해 주면 어쩌지. 비전공자에 전단지, 배너를 만드는 흔한 인쇄물 디자이너는 크나큰 세상의 위협을 느꼈다.
사실문제는 사람들의 인식이다. AI가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디테일을 보여주려면 아마 최소 몇 년은 더 걸리겠지. 근데 사람들의 인식은 그것보다 더 빠르고 가볍다. AI에게 몇 마디 던져주면 '알잘딱깔센'으로 만들어주는데(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볼 때는 전혀 아니지만.) 왜 디자이너에게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디자인을 맡겨야 하나 그런 생각이 모두에게 서서히 번질 것이다. 경기도 안 좋아서 가뜩이나 일이 줄어드는데 인식조차 그렇게 변하겠지. 그 증거로 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몇 년 동안 물가가 그렇게 올랐음에도 작업 비용을 올린 적 없는 나는 가만히 있다가 디자인비가 너무 비싸다는 얘기를 수시로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경기가 어려운 것도 한 몫하겠지만.
일을 하면서도 늘 비전공자가 얼마나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지방 변두리에 사는 프리랜서가 얼마나 오래 이 일로 해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최근 들어 이제 끝물이구나라는 감각을 절실히 느꼈다. 일감이 서서히 줄었고 월 수입이 백만 원이 넘지 못하는 달도 있었다. 프리랜서라는 그럴싸한 허울 속에서 삶을 축소하며 그럭저럭 버텨왔는데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위기감에 휩싸였다. 허나 이제와 뭘 어찌해야 할까.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고 막 졸업한 청년들의 취업조차 그렇게나 힘들다는데 이젠 뭘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한숨이 푹푹 쉬어졌다. 이대로 끝난 건가. 내 인생.
그렇게 고민하고 고민하다 내 진로를 AI에게 물어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AI로 인해 직업이 빼앗길 판인데 비굴하게도 AI에게 내 미래를 물어봐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찾아왔다. 그것은 나에게 여러 갈래의 길을 알려줬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새로 따라느니, 디자이너로서 스킬업을 하라느니. 대체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해결책 중 다시 전공으로 돌아가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조차 별로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그나마 가장 괜찮은 선택지가 아닌가 싶었다.
35살에 제대로 된 경력도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래. 그래도 4년제를 졸업하고 받은 교원자격증은 아직 남아있잖아. 교사는 너무 괜찮은 직업이니까. 설령 임용고시에 합격한 정교사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간제만 할 수 있다 해도 지금 당장 나에게 가장 최선인 선택이 아닐까.
그렇게 10년 동안 아주 멀리 걸어온 내가 다시 방향을 180도 바꾸어 돌아가자 마음먹었다. 일단 돌아가보자. 돌아가서 어떻게든 그들 사이에 끼어보자.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은 나는 새로 들어온 고객의 문의에 비장한 마음으로 답장했다.
‘죄송해요. 현재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작업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