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igging : ‘파다’를 뜻하는 영어 단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소비자가 선호하는 품목이나 영역에 깊게 파고드는 행위
레트로 유리잔 수집은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소소한 취미다. 나보다도 특히 남자친구가 소위 ‘맥덕’(맥주덕후)라고 할 정도로, 맥주를 좋아했다. 라거, 필스너, 에일, IPA, 사워, 흑맥주 등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들을 맛있게 마실 수 있는 최적의 맥주잔 모양이 있고, 브랜드, 제품마다 전용잔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내 입맛에 쓰기만 한 소주보다는, 기왕 마실 거 안 마셔본 새로운 맥주들을 찾아 마시면서 전용잔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동묘시장을 구경 가서 신세계를 만났다. 간판도 없고, 천막으로 겨우 눈비를 피하며 그릇과 잔들을 잔뜩 쌓아 놓고 판매하는 매장이다. 처음 방문했을 때 꽤나 추운 날이었는데도, 호기심에 구석구석 뒤지며 소장 욕구 자극하는 맥주잔들을 찾아냈다. 정신없이 담다 보니, 10여 개의 잔들을 골라 10만 원도 넘게 지출했다. 이날부터 레트로 유리잔이 우리의 수집 목록에 새롭게 추가되었는데, 바로 서울우유, 앙팡과 같이
1900년대 후반 브랜드에서 사은품으로 제공했던 잔들이다.
레트로 유리잔이 매력적인 이유는 제작될 당시의 감성과 트렌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시대를 살아온 세대는 아니기에 개인적인 추억이 담겨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감성과 분위기를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구매해 소장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적인 행사의 경우 행사마다 기념 잔이 제작되는데, 기념 잔을 모으는 재미도 쏠쏠하다.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불어 기업에서 새롭게 레트로풍 유리잔을 출시하기도 하지만, 세월의 때가 묻은 수십년 전 제품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너무 트렌디하고 티끌 없이 깨끗하다랄까. 지금은 3-40년 되었지만, 오래오래 소장하다보면 100년 전 유물을 소장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시간의 축적이 가치를 더한다.
유리잔이 또 좋은 점은 실용성이다. 단순히 장식을 위한 목적인 물건은 많이 사 모으기 부담스럽다. 유리잔은 물 잔, 찻잔, 주스 잔, 우유 잔 등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실용성이 내재되어 있다. 수십 년이 지나도 깨지지만 않으면 곰팡이 피거나 녹슬 일 없이, 견고하다. 플라스틱처럼 가볍지 않다. 그리고 버려지게 되었을 경우에도 녹여 쓸 수 있으니 재활용에 용이하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시간이 흘러 이런저런 이유로 모은 유리잔들이 넘쳐나게 되자, 우리는 살림살이를 합친 후 하나둘씩 당근에, 스마트스토어에 판매해보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이런 거 누가 알고 사겠어?’하는 마음으로 올렸다. 간간이 구매해 주는 분들이 있을 때마다 그렇게 반갑고 동질감을 느낀다. 또 새로운 곳에서 새 주인과 함께 오래오래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포장해서 보낸다. 아직도 한참 많지만, 하나둘씩 비워나가면 또 새로운 잔들로 채울 수 있기에 열심히 보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