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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May 29. 2020

배달음식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집밥 러버에서 배달앱 VIP로

나는 배달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 프로자취러로서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뚝딱뚝딱하면 한 끼쯤은 금세 만들었다. msg로 범벅된 배달음식보다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건강한 집밥이 더 좋았다. 다양한 재료를 조합해 눈이 번쩍 뜨이는 미지의 맛을 찾아내는 과정도 즐거웠다. 음식과 잘 어울리는 예쁜 그릇에 담아내어 플레이팅으로 차려내면 대접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이유로 배달음식보다는 집밥에 환호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집에서 요리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가스렌지 유해가스나 그을음 같은 것이 혹시 아이 뇌세포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음식 냄새가 아이한테 배거나 과한 자극이 되는 건 아닐까 우려되었다. 그렇다고 코로나19로 시끄러운 이 시국에 5개월 아기를 데리고 매번 식당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장 큰 문제는 신생아를 돌보며 만신창이가 된 내 상태였다. 아이 돌보기는 그만둘 수 없으니 집안일을 그만두는 게 옳았다. 요리에 쏟을 체력을 아껴 아이를 케어하는 데 쓰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나 배달음식 안 좋아하는데…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겠지.’ 스물스물 올라오는 죄책감을, 배고픔으로 찍어 눌렀다. 결국 나는 한 손으로는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 속 배달앱에 접속했다. 먼저 리뷰 점수가 높은 곳 위주로 쓱 훑어봤다. 얼씨구나 최고 평점의 보쌈부터 담았다. 이제 결제 버튼만 누르면 된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심정이 이런 걸까. 한참을 망설이다 꾸욱- 눌러버렸다. 배달 소요 시간 30분. 흥분된 마음을 가다듬으며 첫사랑 아니, 첫 배달음식을 기다렸다.


세상에, 나는 엄지와 검지만 까딱거렸을 뿐이었다! 20분 10분 5분 1분… 띵똥 드디어 스마트폰 속 보쌈이 현관 앞에 나타났다.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일도 아니었다. 평소 먹고 싶었던 음식들을 모두 집으로 불러들였다. 맛있게 맵기로 소문난 떡볶이, 와규와 바질의 궁합이 찰떡인 와규타다끼덮밥, 양념 비법을 캐내고 싶었던 돼지 바비큐까지 동네 맛집이란 맛집은 몽땅 털었다. 오늘은 아기 엄마에겐 ‘넘사벽’인줄만 알았던 핫한 카페의 디저트까지 주문했다. 우리 집 식탁은 날마다 잔칫상이요, 천하제일 맛집이 되어가는 중이다.





배달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했던 나의 발언을 철회한다. 인생에 중요한 사람이 생겼고 당분간은 그 사람에게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본능 때문에 나는 변했다. 아이란 그야말로 거스를 수 없는 불가역적인 존재라는 걸 매일 깨닫는다. ‘상황이 안 되면 그럴 수도 있지’, ‘가스불 안 켜고 밥 한술 뜨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엄마가 되니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심정으로 이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상황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심지어 스스로 자기 암시를 걸기도 한다. 내 머릿속 몇 가지 단어의 개념이 달라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볼품없던 일회용 그릇은 ‘심플한 케이스’로 격상되었고, msg의 느끼함은 ‘지상 최대의 감칠맛’으로 둔갑한 상태다. 누가 요리를 하고 누가 아기를 돌보며 누가 설거지를 하느냐, 역할 나누기에 급급해 하지 않고도 사이좋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준 배달음식이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정성껏 요리해서 남편과 함께 여유롭게 식사했던 날들은 아주 조금 그립기도 하다. 그런데 그게 다 다. 그립긴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이 시간을 즐거이 버텨내어 우리 세 식구가 식탁에 둘러 앉아 함께 식사를 즐길 날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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