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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Apr 20. 2021

역시 자연스러운 게 좋아

눈썹 문신을해야 비로소 자연스러운 내 얼굴

3월의 마지막 날, 눈썹에 작은 점 여러 개를 찍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잘한다는 친구의 말에 솔깃해져 눈썹 문신을 감행한 것. 겁이 많은 나는 조금 망설였다. 내가 이런 걸 할 줄이야. 평생 생각도 안 해본 눈썹 문신을 하려고 침대에 누워있으니 심장이 쿵쾅쿵쾅 나댔다. 마취크림만 안 발랐어도 삼십육계 줄행랑 각이었다. 내가 중학생일 적에 웃어도 우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눈썹을 하고 와서는 한숨만 푹푹 쉬던 엄마가 생각났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다. 엄마의 전철을 딸이 다시 밟을 순 없어 원장님께


“원장님, 저 근데 정말 자연스럽게 하고 싶거든요. 얼굴에 칼 대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심지어 저는 화장도 잘 안 해요. 자연스럽게 연하게 해주세요.”

해드릴  있죠. 사실 저도 대충 연하게 하면 빨리 끝나서 좋아요. 근데 예쁘게 만들어 드려야 저도 보람이 있죠. 고객님은 눈썹 모가 진해서 점으로 촘촘히 진하게 찍어야 티가  나요.”


나의 소심한 반항과 의지는 자기 일에 진심인 원장님의 말 한마디에 꺾여버렸다. 아니 마음을 옮겼다는 편이 더 옮다. 일하기 편한 쪽이 아니라 고객이 예뻐지는 쪽을 추천한다는 말, 장사꾼도 의료인도 아닌 아티스트 같은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결국 그에게 38년 산 생눈썹을 온전히 맡기기로 했다.


눈을 질끈 감고 누웠다. 얼굴에 점을 빼 본 적은 있어도 찍으러 온 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내 눈썹을, 내 얼굴을, 내 앞날을 맡기는 건 살 떨리는 일이었다. 제발 엄마처럼만 되지 마라 제발. 제발. 제발.

눈썹 위로 날이 서걱서걱 거리다 뾰족한 것으로 콕콕콕콕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 아프진 않았다. 참아볼 만했다. 콕콕콕콕 찌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날수록 점점 면이 커지며 점점 그림이 완성되어 가고 있겠지. 누군가에게 점묘화를 그리는 캔버스를 내어준 기분이었다. 남의 얼굴에 매일 점묘화를 그리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무슨 생각일까? 오늘도 자연스럽고 예쁜 점묘화를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일까?


아프지 않아서인지 생각보다 생각이 많아졌다. 문득 여배우들 얼굴에 있던 점이 떠올랐다. 고소영, 전지현, 한가인…. 시대를 풍미했던 예쁜 여배우들의 코에는 점이 있었다. 신기한 세상이었다. 요즘엔 여배우가 아니라도 밋밋한 얼굴에 포인트를 주기 위해 많이들 시술한다고들 한다. ‘매력점’ ‘미인점’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볼, 눈 밑 등에 한다고. 매력점이 없어도 충분히 예쁜 얼굴들인데 왜 굳이 점을 찍을까 의문스러운 적이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자연스러운 게 좋았다.

자연스러운 것.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고 쫑알거리고 있는 나의 자취를 돌아보니 웃음이 나온다. 연애에 있어선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했는데 어쩌다 어색한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한 이불을 덮고 잔다. 자연분만을 꼭 하고 싶어서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준비까지 다 해놨는데 어쩌다 응급 제왕절개로 애를 낳았다. 호박잎에 된장 푹 찍어먹는 자연밥상을 좋아하는데 어쩌다 배달의 민족 마니아가 되었다. 맙소사 하다 하다 이제는 얼굴에 점까지 찍으려고 누워있다.


자연은 무슨 자연. 어쩌면 나는 인위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대체 자연스러운 것이 뭘까? 사계절의 시간을 물 흐르듯 보내는 자연 같은 것일까? 꽃은 꽃대로 지고 피고 바람은 바람대로 오고 가고 강은 강대로 흐르고 모이고. 그저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도 별 탈이 없는 자연처럼 무리 없이 편안하게 흘러가는 것. 사실 이건 자연의 일부 아름다운 면일지도 모른다. 천둥번개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벌레가 베베 꼬이는 여름날의 들판 구석, 사람을 집어삼키는 높은 파도 같은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불편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자연’이다. 이만하면 자연과 자연스러움은 다른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가 좋아한 자연스러움은 자연의 불편하지 않은 아름다움과 편안함이었다.


눈썹 문신을 결심한 이유도 실은 아름다움과 편안함을 갖기 위해서였다.

17개월 아들과의 외출 준비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일이다. 결코 편안할 수가 없다. 한 명의 작은 인간이 문밖을 나서기 위해서는 꽤 많은 준비물이 필요하다. 매번 숨을 헉헉거리며 준비해보지만 늘 한 두 가지를 빠뜨린다. 작은 인간의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고, 준비물을 챙기고, 문을 열기까지는, 숨을 몇 번이고 참아야 할 정도로 인내심이 필요하다. 언제는 숨을 정신이 반쯤 나가서 스커트를 뒤집어 입고 나간 적도 있다.(이후로는 겉과 속, 앞뒤가 확실히 구분되는 옷만 입는다는 슬픈 전설이 있습니다.)


외출 준비에 허덕이느라 옷은 뒤집어 입어도 잊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눈썹이다.

왼쪽 오른쪽 균형을 맞추고 꼬리는 눈 길이보다 조금 더 빼고 하여 가능한 인간다운 눈썹으로 나간다. 눈썹이 자유분방한 날에는 왠지 몸이 자유분방하지 못하다. 괜히 누구라도 만날까 싶어 목과 어깨가 구부정해진다. 눈썹이 제대로 장착된 날에는 얼굴만큼 마음도 편안했다. 편안한 얼굴과 편안한 마음을 위해 큰맘 먹고 감행했던 눈썹 시술이었다.


이제 다 됐다는 원장님의 말에 벌떡 일어났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눈썹 완성. 두근두근.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났다. 원장님은 자기 일을 사랑하는 분이셨다. 실력과 소명감으로 강남에 입성한 뷰티아티스트셨다. 거울 속의 눈썹은 좌우대칭 밸런스가 좋았고 ‘집에서 살짝 다듬은 듯’ 보였다. 그게 포인트였다. 원래 예쁜 눈썹 같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좀 전의 실랑이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원래 내 것 같은 눈썹을 검지로 슬쩍 만져보며 기분 좋게 나섰다.


역시 나는 자연스러운 게 좋다. 어색하지 않고 편안한, 원래의 상태처럼 아름다운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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