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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칠호 Apr 26. 2021

그날그날의 마음을 아껴두지 않고

오지랖의 신세계

회사가 아니라 작업실로 출근한 지 6개월째. 집 현관에서 신발 끈을 동여매고 작업실 한편에 외투를 걸어놓기까지 10분 남짓. 친근한 동네 골목길을 매일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걸어간다. 9호선 지옥철을 타고 삼성동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억울할 만큼 신나는 기분. 양손을 신나게 흔들어 재끼고 자체 작사 작곡한 곡을 흥얼거릴 정도로 신이 난다. 게다가 작업실을 함께 쓰는 친구들까지 얻어 흥에 물이 올랐다. 종일 입에 지퍼를 채우고 사이버 교감에 매진하며 일만 할 줄 알았던 내게 동료가 생기다니!


빼빼로데이에는 빼빼로를, 연말에는 쿠키를, 신년에는 새해 덕담을 나누었던 나의 다정한 작업실 메이트들. 직업과 취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어른 친구를 대할 수 있는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아줌마라는 사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다. 그렇게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 내 정체성을 새삼 확인하는 사건이 있었다.


내 옆자리, 설계 일을 하는 원 씨는 덥수룩한 생머리의 소유자였다. 가끔 검은색 비니를 푹 뒤집어쓰고 오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달, 머리를 말끔하게 정리해 무려 컬까지 넣어 나타났다. 안 그래도 신나는 기분으로 작업실 문을 연 아줌마는, 봄맞이 새 단장을 한 청년을 보고는 차오르는 텐션을 누르지 못하고 하이톤의 인사를 건넸다.


“이야~~ 원 씨 머리 파마했어요? 대박 너무 멋있다. 반할 것 같아! 앞머리 조금만 더 넘겨볼래요? 완전 배우 느낌 알지?!”


원 씨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나와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채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생각해 보니 ‘이야~’라는 감탄사가 좀 느끼했던 것도 같다. 마지막에 앞머리를 넘기란 말은 왜 해가지고.


나도 이제 아줌마가  되었구나하고  딸린 아줌마가  나는 생각했다. 아마 예전의 나였다면 “머리 예쁘네요라는  정도나 조심스레 건네 볼까. 좋다, 고맙다, 멋있다, 예쁘다  밖으로 시원하게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던 날들. 그런데 웃긴 , 마음을 다해 오지랖을 부린 저날  순간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머리를   그였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충격이었다. 이것이 바로 오지랖의 신세계인가. 뭐야,  이렇게 시원한 거지?


글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 떠올랐다. 남의 헤어스타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친정엄마였다. 엄마는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을 다해 오지랖을 부리며 친구 사귀기를 즐겼다. 국민학생 딸과 떡볶이를 먹던 중이었다. 딸보다 조금   보이는 여자아이가 입가를 휴지로 닦아가며 떡볶이를 조심조심 먹고 있었다.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다. 예쁜 언니는 떡볶이도 예쁘게 묵네, 우째 이리 이쁘게 키아쓰까, 며캉년이까,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엄마는  언니의 엄마와 동네 친구가 되었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언니와 떡볶이에 심취해 있던 나는, 오래도록 데면데면한 사이로 남았지만. 엄마의 오지랖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떡볶이집에다 매운맛이 텁텁하니 무를 넣어라 마라 다시마는 빨리 빼라 하는 애정 어린 간섭까지 늘어놓았다.  그런 것에까지 마음을 쓸까. 나는 엄마의 마음 씀과 시간 씀이 신기했다. 때로는 불편하고 부끄러워서 ‘엄마 시간 많아?’라고 묻고 싶었다.

아, K-아줌마의 사교성과 친화력과 오지랖이여.




지난주 삼척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깊고 푸르렀던 동해 바다와 가슴 벅차게 장엄했던 일출, 폐 구석구석까지 가닿았으면 싶게 깨끗하고 향긋했던 소나무숲. 무엇보다 최고로 좋았던 것은 모처럼 찌-인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어제 다녀온 것처럼 눈앞에 바다가 생생한데 시간이 훌쩍 흘렀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고 아이의 웃는 얼굴이 살짝 변했다. 사랑하는 마음, 고마움 마음, 미안한 마음 같은 것들을 그날 그곳에 조금 남겨두고 온 것 같은데 벌써 새로운 오늘 새로운 아이가 되었다. 새로운 아이에게는 새로운 오늘의 사랑을 주어야지. 그렇다면 그날의 아이에게는 그날의 사랑을 아껴두지 않고 마음껏 써야겠다.  


비단 이런 오늘의 새로운 마음이 아이에게만 향한 것은 아니다.

왜 더 다정한 말을 못 해주었을까. 왜 더 예쁘다고, 멋있다고, 사랑한다고, 괜찮다고 말해주지 못했을까. 내가 가진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후회가 남는 기억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마음을 과하게 전해서 후회한 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나의 엄마는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서’ 애정 어린 오지랖을 부리셨을지도 모른다. 뒤돌아 곱씹으며 아쉬워하는 것보다 그날그날의 마음을 마음껏 쓰고 후회하지 말자는 엄마식 마음 씀.


그나저나 머리를 새로 단장한 원 씨는 3주째 작업실에 나오지 않고 있다. 처음엔 머리에 멋을 내고 휴가를 갔나 했는데 코로나 시대에 3주 휴가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아 이제 슬슬 걱정이 된다. 원 씨가 원래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었던가. 혹시 오해를 하고 있진 않을까. 아, 나 그렇게 이상한 아줌마는 아닌데. 그날 머리가 너무 멋져서 그만. 그래도 그날의 마음 씀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끼는 이들에게는 그날그날의 마음을 아껴두지 않고 마음껏 쓰고 전할 것이다. 단, 느끼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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