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며 들숨, 쓰며 날숨.
나는 꾸준하지 못한 사람이다. 쉽게 흥미를 느끼고 순간 깊이 빠지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덕후 기질은 있어서 일단 관심 가는 대상이 생기면 며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그에 관한 정보를 샅샅이 훑는다. 그리고 일정 수준, 그러니까 어디서든 그 대상이 화제에 오르면 대화는 할 수 있겠다 싶은 수준에 이르러서 관심이 사라진다. 하여간 끈기가 없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거의 평생에 걸쳐 꾸준하게 해온 것이 독서다. 독서였다. 아니, 역시 독서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까닭은 오 년 간 절독을 했다가 몇 달 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있는 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었는데 지난 오 년은 읽지 못하는 저주에라도 걸린 것처럼 웬만해서는 읽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왜 그랬을까.
읽으면 쓰고 싶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글이 쓰고 싶어질까. 나는 잔뜩 읽어서 내 안에 글이 가득 차면 쓰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거나, 명징한 언어와 맛깔난 표현의 에세이를 읽으면 쓰고 싶다는 마음이 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하루 종일 내 일상과 행동 하나하나를 '문장화' 시킨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연초록색 수세미를 물에 담갔다가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 수세미가 무음의 비명을 지르며 눈물 흘리는 듯하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 세제를 짰다. 어쩔 수 없지. 해야지. 어쩌겠어. 수세미에 거품을 내고는 더러운 물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놓은 밥그릇 하나를 건져내어 문지르기 시작했다.]
요컨대 설거지를 하면서 모든 과정을 머릿속에서 글로 쓰는 것이다. 내용도 맥락도 없이, 마치 고장 난 타이프처럼, 의미 없는 문장을 계속 출력한다. 물론 실제로 타자를 쳐서 남기지 않으니까 그렇게 출력된 문장들은 형체 한 번 가지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중 꽤나 괜찮은 문장이 있었다 해도 알 수가 없다. 떠올리자마자 휘발되어 버리는데, 뭐.
돌이켜보면 늘 글쓰기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며 주저하며 살아왔다. 읽으면 쓰고 싶긴 한데 내까짓 게 써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나는 대단한 문장가도 촉망받는 신예 소설가도 날카로운 필력의 에세이스트도 아닌, 그저 글쓰기를 탐내고 흠모하는 몽상가인데. 내가 쓰는 글이 과연 무슨 가치를 가질까 싶어서.
쓰고 싶지만 써도 된다는 허락과 자격을 얻지 못한 나는 그래서 읽기조차 멀리했다. 쓰지 못할 바에야 읽지도 않겠다는 도피성 절독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런 내게 [글쓰기는 자아의 행위]라고 윌리엄 진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아의 행위, 그러니까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글쓰기라는 거다. 게다가 [자기 자신을 팔자. 그러면 자신만의 주제가 호소력을 발휘할 것]이라고도 하셨다. 다시 말해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 해도 분명한 자아와 명료한 생각을 가지고 꾸준히 쓴다면(진서 선생님 역시 글쓰기는 기능이기에 꾸준히 연마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언젠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의미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쓰고 싶어? 그럼 써!'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글쓰기의 거장에게 글쓰기를 허락받은 순간이었다.
내가 당장 대단한 글을 쓸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언제쯤 팔리는 글을 쓰게 될지 또한 요원하다. 그런 날이 올 것인지조차 미지수다. 그러나 꾸준하게 쓸 이유는 생겼다. 글쓰기가 당연한 나의 업인 듯, 하루에 시간을 정해놓고 매진해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될 당위성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읽고 쓴다. 읽으며 들숨, 쓰며 날숨. 오늘도 숨 쉬듯 읽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