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처럼 혹은 계시처럼
다른 사람들을 글을 어떻게 쓸까?
나는 첫 문장이 떠올라야 글을 쓴다.
무언가 쓰고 싶다고 생각해도, 대략의 내용과 결말까지 가지고 있어도 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마치 계시처럼 떠오르지 않으면 도무지 써지지가 않는다. 대신 첫 문장이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면 시작부터 끝까지 일사천리로 써내려가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 K공원은 두 세계의 경계 같은 곳이었다.]
예전에 소설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한 주에 한 편씩 하나의 주제로 짧은 단편을 쓰는 수업이었다. 당시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주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땅거미 지는 창밖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는데 문득 저 문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첫 문장부터 끝 문장까지 단숨에 써내렸다. 마치 신내림을 받은 듯, 쓰는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인 듯 묘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써낸 소설이 괜찮은 소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첫 문장'에 휘둘리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첫 문장, 첫 단어, 그게 대체 뭐길래...! 어째서 첫 문장이 떠오르지 않으면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말이냐...! 저 높은 곳 어딘가에서 첫 문장이 '내려오시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노라면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무작정 입을 벌리고 있는 바보가 된 기분이다.
그나마 첫 문장에 집착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점이 위로가 된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를 보라. 소설의 주인공 굴드는 수년 동안 구상해온 책을 쓰기로 결심했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완벽한 첫 문장'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책을 시작할 완벽한 첫 문장을 찾기 위해 위대한 작가들이 쓴 위대한 작품들의 첫 문장을 샅샅이 훑는다. 그리고 그들의 '첫 문장'이 어째서 완벽한지를 분석하고 해설한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하고 고민한들, 그의 책을 시작할 완벽한 첫 문장을 찾기란 역부족이다. 고심 끝에 그는 결국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그때 그에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천재적인 생각이. 장벽에 맞설 수가 없다면 장벽을 피하거나 뛰어넘으면 될 것이다.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는 데 실패했다고? 까짓것, 문제 될 것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 문장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다.]
그의 '천재적인 생각'은 어떤 결말로 이어질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짧디짧은 소설이 글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첫 문장 공포증'을 꽤나 재치있게, 그러나 여실히 표현해냈다는 점이다. 굴드의 말처럼 '위대한 책들에는 언제나 완벽한 첫 문장이 있다'.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라던가, [오늘 엄마가 죽었다] 같은. [나는 유령이다]도, [길을 잃었다. 어디인지 모른다] 역시 다음 문장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첫 문장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다. 조금 부풀린다면 글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랄까.
좋은 첫 문장이 글 전체의 완성도를 보장해주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계속 써나갈 수 있게 해주는 건 확실하다. 좋은 첫 문장에서 힘을 얻어 두 번째 문장도, 세 번째 문장도 쓸 수 있다. 그러니 첫 문장이 계시처럼 임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나 나처럼 글쓰기 근력이 (아직은) 부족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오늘도 나는 길치가 길잡이 기다리듯 첫 문장을 기다린다.
그러니 오라, 첫 문장이여. 속히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