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이 되기 전에 읽히는 글을 쓰고 싶어
사람을 나누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진 사람 못 가진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또는 안 배운 사람, 잘난 사람 조금 덜 잘난 사람, 등등등.
나에게는 한 가지 기준이 더 있다.
쓰는 사람, 쓰지 않는 사람.
여기서 쓴다의 목적어는 돈이 아니다. 글이다.
나는 쓰는 사람을 동경한다. 부러워한다. 때로는 미칠 듯 경외하며, 꼭 그만큼 미워한다. 나에게 쓰는 사람은 우러름의 대상이자 꿈의 종착지이다.
그런데, 일단은 나도 쓰고 있다. 지금 이순간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동경하는 쓰는 사람과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들의 글은 읽히고, 나의 글은 읽히지 않는다.
결국은 보아주는 사람의 유무다. 그 차이가 그들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도랑을 판다.
그러나 아무리 도랑이 깊다한들, 저 건너편에 닿고자 하는 마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다. 뭐라도 그 도랑에 던져넣고 채워서 건너갈 길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일단 채워넣는 것이 결국은 또 글이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실용서든 심지어 경매실전기술이든, 활자로 된 것이라면 꾸준하게 혹은 무턱대고 읽어서 그 도랑에 던지듯 채워넣는다. 그렇게 꾸역꾸역 채워넣다보면, 목구멍에 욱여넣은 글밥들이 토해져 나올 듯이 아우성을 친다. 바로 그때, 차란! 하고 글이 써지....면 좋으련만 대개는 이렇게 메모장에 와르르 몇 글자 쏟아놓는 데 그치기 일쑤다.
그래, 30대의 그 날에, 소설쓰기 강좌를 듣기 위해 신도림과 한겨레문화센터를 오가던 그 시절에 시작한 읽히는 글쓰기를 계속 했어야 했다. 이렇게 쓰지 못한 체증이 잊을만하면 울컥대고 올라와 목을 메이게 하기 전에. 그 체증이 너무 답답해서 차라리 읽지 않기를 선택하기 전에. 쓰는 사람의 둔턱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비열하게 노려보거나 적절한 단어 하나를 떠올리지 못해 가볍게 절망하기 전에.
서른에 못했던 일, 마흔에 해도 될까(갓 마흔도 아니지만). 불혹에라도 시작하면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기 전에 이 체증이라도 조금 내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더부룩한 속을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뚫듯이.
그래서, 그래. 써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읽히는 글이 되기를 희망하며 이곳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 둔턱에 발자국이라도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며.
이 도랑을 채우고 건너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