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기 위해 살림을 내려놓았다
나는 생계형 워킹맘입니다 3
결혼 전, 각 잡고 하는 '미니멀리스트'는 아니었지만 원래 짐이 많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도 하고 물욕이 많지 않아 자의반 타의반 '세미 미니멀리스트'같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니 '맥시멀리스트'인 남편과 함께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면서 나의 간결한 생활공간은 막을 내리게 됐다. 안 그래도 좁은 집은 남편이 본가에서 가져온 각종 살림살이로 꽉 들어차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나마 내가 워낙 짐 많은 걸 싫어하니 당장 필요하지 않은 건 본가에 그대로 두기도 하고 처분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지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본격 '맥시멀리스트'의 세계로 돌아섰다.
아기용품은 아무리 기본적인 것만 마련해도 도저히 미니멀해질 수가 없었다. 그 흔한 전집이니, 교구 셋트니 하는 것도 산 적 없고 핫딜이라고 쟁인 적도 없는데도 수납공간이 꽉꽉 들어찼다. 물론 장난감이나 옷 등은 그때그때 시기가 지나면 바로 주변의 다른 아기들에게 물려주거나 당근마켓에 내다 팔았는데도, 우리 아이에게 필요한 다른 것들을 들이면서 그 자리는 금새 메워졌다. 애초에 20평짜리 아파트에서 아이를 키우는데 여백의 공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말이다.
원래 최소한의 짐만 두고 청소는 간단하게 하자는 주의였는데, 짐이 많아지니 청소를 할 엄두도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가 깨어있는 한 아무리 치워봐야 1분도 안 돼 더 심하게 어질러지기 일쑤이므로 청소를 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결국 나는 청소를 내려놓았다. 최소한의 위생을 위한 설거지와 빨래, 바닥 닦기, 정리 정도만 할 뿐 실시간으로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애저녁에 포기했다. 그럴 시간에 아이와 눈을 맞추고 놀아주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아기가 어릴 때 읽었던 박혜란 선생님의 책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에서도 아이를 키우면서 청소를 접어뒀다는 대목이 나온다.
밥이나 빨래는 안 하면 당장 불편이 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사실 청소는 안 한다고 해서 당장 큰일나는 일이 아니잖는가. 오히려 청소때문에 쓸데없이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크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손해는 어이없게도 아이들을 괴롭히게 된다는 점이다.
'이제 청소해 놨으니까 어지르지 말아야 돼.'라는 명령처럼 아이와 엄마를 다 구속하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이 명령이 지켜진다면 곧 아이들의 자유를 빼앗게 되는 것이고 만약 안 지켜진다면 엄마의 짜증을 촉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명령이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발췌
심지어 좀 어질러진 집은 아이의 상상력을 키우는 순기능도 한다니 더 이상 청소를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복직을 하고 나선 청소는커녕 집안일 자체를 거의 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나는 지금도 별다른 죄의식 없이 '최소한의 정리정돈'만 하며 지내고 있다. 다만 이제는 어느 정도 지시수행과 정리의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아이와 함께 스스로 어지른 물건들은 제자리에 두고 잠자리에 드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
Karolina Grabowska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그래도 집안일 중 요리는 제법 좋아하고 즐기는 편이었기 때문에 휴직 중에는 아이 식사와 간식을 포함해 밑반찬과 메인메뉴를 시간이 허락하는 한 손수 만들어 먹는 편이었다. 하지만 복직을 하고 나서는 도무지 요리를 할 만한 시간과 체력적 여유가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하기 위해 내 몸을 한없이 혹사시킨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아이한테 짜증밖에 안 낼 것 같았다.
복직 이후부터는 반찬은 반찬가게에서, 메인메뉴는 밀키트로 30분 안에 조리해 먹기로 했다. 어차피 아기 밥은 따로 먹는 경우가 많아 밀키트로 소분된 2인분을 사 먹는 게 재료도 남지 않고 이래저래 낫다. 그나마도 하기 싫은 날은 '배민'을 켰다. 아이가 먹는 밥은 남편이 비번이라 아침 일찍 퇴근해 집에 있는 날,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의 국과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쟁여 두고 있다. 여러모로 남편이 나보다 부지런한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꼭 필요하다고 해서 산 건조기와, 아이 돌무렵 산 식기세척기는 비록 소형이지만 정말 잘 샀다고 생각한다. 빨래를 널어 말리거나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느라 아이를 방치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변에 출산을 앞둔 가정이 있다면 위의 두 가지 가전은 왠만하면 꼭 갖췄으면 하는 생각이다. 특히 맞벌이 가정이고 '이모님'을 쓸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은 가정이라면 거의 필수가 아닐까 싶다.
물론 놀랍게도 집안일에 드는 시간이 하루 1시간이 채 되지 않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 가면 아기가 완전히 잠들기 전까지는 거의 1초도 앉아서 쉴 틈이 없이 계속 풀가동을 해야 한다. 우리 가정은 남편이 교대근무라서 야간 출근을 해 나는 아이와 단둘이 있는 날도 많다. 두 돌이 지났지만 여전히 밤잠을 설치는 아기 덕분에 사실상 24시간 풀가동 모드이다. 여기에 밤잠까지 줄여서 '주부 역할'까지 완벽하게 하려면 사실상 수명을 깎아먹는 셈이지 않을까. 맞벌이 생활 자체가 직장인으로서, 엄마로서 1인 2역을 해야 하는데, 주부 역할까지 더해 3역을 하는 것은 사실 좀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바깥일을 하고, 엄마는 집안일에 전념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던 예전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엄마도 아빠도 바깥일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해야 아이에게 필요한 걸 해주면서 노후대비도 가능해진 세상이 됐는데, 여전히 엄마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집안일은 예전 외벌이 시대와 같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밀키트와 각종 가전기구와 다양한 외식메뉴라는 문명의 이기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래도 엄마는 그러면 안 돼'라는 이유로 퇴근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엌에서 밤을 새는 워킹맘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줬음 좋겠다. 엄마 혼자 자기 만족으로 끝나면 모르겠는데, 엄마의 과로는 보통 아이들에게도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아이가 좀 자랐다면 모를까 한참 어릴 때는 집안일보다 좀 더 급하고, 중요한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게 우리 부부도 살고 아이도 만족스러운 방법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