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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초 Aug 22. 2022

맞벌이 부부가 코로나에 걸리면

나는 생계형 워킹맘입니다 20

지난 2년 반 동안 잘 피해왔던 그것이 결국 우리집에도 뒤늦게 찾아왔다.

시작은 남편이었다. 남편의 새로 바뀐 근무지 동료가 코로나 양성판정을 받았고 마스크를 잘 쓰지 않는 분이었던 탓에 함께 일하던 대부분의 동료들이 줄줄이 감염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증상 없던 남편은 몇 번의 음성판정 끝에 결국 양성판정을 받고 작은 방에 홀로 격리됐다.


코로나 양성이긴 했지만 인후통 외 별다른 증상이 없던 남편보다, 막상 내가 더 비상이 걸렸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탓에 '돌봄휴가'따위 없는데다 딱히 대면업무가 아닌 나는 재택으로라도 근무를 해야만 했고, 아이는 가족중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기 때문에 등원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원칙적으론 본인이 음성이면 등원이나 등교가 가능하다지만 개별 원의 방침에 따라야 한다는 별칙이 붙어 있었다. 물론 원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좁은 공간에 영유아가 다수 있는데 코로나 감염 가능성이 높은 상태에서 등원을 시킨다는 건 매우 위험한 것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 입장에서는 혼자 풀타임 재택근무를 하면서 동시에 가정보육으로 아이를 보고 식사까지 챙겨줘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남편에겐 미안하지만 남편의 건강보단 당장 아이의 돌봄과 내 근무 걱정이 앞섰다.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당장 마감을 해야 하는데, 아이는 옆에서 밥 먹기 싫다고 난동을 부리고 있고, 결국 되도록 안 보여줬던 뽀로로 영상을 틀어 앉혀놓고 옆에서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 밥은 떠 먹여야 했기 때문에 나는 오후 늦게까지 밥을 쫄쫄 굶었다.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낮잠을 재우니 오후 3시였다. 스트레스로 위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눈물이 줄줄 났다.

이미 올 여름에는 남편의 출장, 곧 이어 골절사고로 내가 아이 목욕과 힘쓰는 일을 2주간 했으며, 남편이 깁스를 풀자마자 이번엔 코로나에 걸린 것이었다. 차라리 내가 걸렸더라면 나도 방에서 '쉴 수' 있었으련만, 아니 차라리 다같이 걸렸더라면 같이 겪고 끝났을텐데 하는 원망이 마구 들었다. 왜 하필 최악의 경우가 일어난 걸까? 왜 항상 내가 가장 많이 힘들어지는 경우만 일어나는 걸까?

친정과 시댁에서도 코로나에 걸린 사위만 걱정할 뿐 혼자 업무와 육아와 집안일을 다 하느라 밥도 못 먹는 나에겐 그저 "안 걸렸으니 다행"이라는 말들만 할 뿐이었다. 다행? 뭐가 다행인데? 나는 지금 사라져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결국, 이런 생활을 일주일 지속하느니 그냥 '불효녀'가 되기로 결정했다. 아이를 데리고 짐을 바리바리 싸서 친정엄마 집으로 '피신'을 간 것이었다. 사실 엄마도 65세를 앞둔 고령자라 걱정이 컸지만, 어쨌거나 나와 아이는 아직 감염이 안 된 것 같았고 별 도리가 없었다. 이런 상태로는 하루 8시간동안 뽀로로를 보여주지 않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친정으로 들어가니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아이는 집에서 못보던 TV를 원없이 보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일에 매달려있는 동안 할머니랑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밥도 제대로 끼니에 맞춰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근처에 친정이나 시댁 등 도움받을 곳도 없고 연월차나 가족돌봄휴직이 없는 워킹맘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분신술이라도 써서 잠시 몸을 두 개로 나누는 걸까? 하긴 워낙 엄마들에게 신급의 능력을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는 세상이다 보니 '왜 엄마가 돼서 분신술 하나 못 쓰고 친정에 민폐를 끼치냐'는 소리도 나올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뭐, 퇴사를 하겠지. 나는 사직서를 내려 해도 회사에 가야 하는데 아이를 데리고 갈 순 없으니 퇴사를 못 하고 친정에 왔지만. 그러고 보니 코로나 이후 맞벌이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코로나 자가격리와 원격수업의 타격을 못 이기고 수많은 엄마들이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간의 남편 자가격리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이와 나는 계속 음성이었다. 걱정했던 릴레이 감염은 일어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간 것 같았다.

문제는 뜬금없이 2주 뒤에 일어났다. 잘 놀고 잠자리에 들려는 아이의 이마가 너무 뜨거웠다. 열을 재보니 39도에 가까웠다. 해열제를 먹이고 열보초를 섰는데, 다음날 아침에도 여전히 열이 있었다. 뭔가 사태가 심상치 않아 다음날 아침 소아과에 가 보니 양성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양성판정을 받았다.


처음 보는 두줄



이전에는 솔직히 말해 '나도 코로나라도 걸려서 일주일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이다. 워낙 일과 육아로 분초를 다투며 살다보니 휴식이 너무 간절했는데 코로나급 전염병이나 죽을병이 아니고서야 쉴 명분이 없는 게 워킹맘의 현실이니까다.

물론 아이와 함께 격리생활이다보니 완전히 쉴 수는 없었지만, 이틀 정도는 심한 고열과 몸살로 병가를 내고 방에 드러누워있었는데, 휴식이라기엔 투병이었다. 역시나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된다는 깊은 반성과 함께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 아파야 비로소 육아나 일에서 손을 뗄 수 있는 내 처지가 서글프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번엔 남편이 '돌봄휴가'를 내서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아픈 몸으로 몰빵을 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사기업에서는 누리기 힘든 혜택이다. 하지만 이 역시 남편이 돌봄휴가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맞벌이는 언제나 외줄타기를 하며 저글링을 하듯 녹록지 않은 일상이지만, 특히나 이런 시국에는 정말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기적이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 가족의 격리생활 삼일 차, 컨디션이 좀 나아진 나는 병가를 끝내고 방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고 남편이 밖에서 아이를 케어하고 있었다. 열은 식었지만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 아이는 계속 울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이번엔 이틀동안 두 코로나 환자를 케어하던 남편이 과부하에 걸렸다. 뒤늦게 열과 심한 근육통, 오한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코로나 격리기간이 끝났어도 무리를 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롱 코로나'라고 하던가. 급기야 우리 가족은 사람 수 만큼 약 봉지를 쌓아두고 돌아가며 먹었다. 아이도 돌아가며 보고 쉬었다.


어쨌든 그렇게 전쟁같았던 자가격리가 끝이 보였다. 역시나 나는 대한민국의 일개미 워킹맘이다보니, 당장 내 몸이 아픈 것보다는 돌봄 문제가 더욱 크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물론 아이가 아플 땐 내리지 않는 열로 겁이 덜컥 나고 마음이 아팠지만.

자가격리 기간 내내 하루에 50권 정도는 책을 읽어주기를 요구하는 아이 덕분에 다 갈라진 목소리로 명랑하게 동화구연을 반복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몸이 아프니 전에 없이 '엄마 껌딱지'가 돼 방에서 안나오는 엄마를 찾으며 우는 아이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아파서 누워 있든, 일을 하든 아이는 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결국 내가 지금은 아이 곁에 있어줘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 몹시 싱숭생숭해졌다. 이전에도 썼다시피 원에도 거부 없이 잘 다니는 무난한 성향의 아이라 일을 하면서도 크게 미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그간 내가 너무 무심했던게 아닌지, 아님 어쩌면 현실이라는 미명하에 아이의 요청을 애써 외면해온 건 아닌지 싶어 묘한 죄책감도 들었다. 항상 맘속에 품고 다니는 사직서 한 장이 팔랑거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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