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무척 바쁜 날이었다. 내가 담당하던 출입처가 중대 발표를 하는 날이라 아침 일찍 기자실에 가서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헐레벌떡 폈다. 정신없이 받아적어 놓은 간담회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께서 카톡을 보내 왔다.
많은 엄마들이 그렇듯 키즈노트 알림장을 제외한 어린이집으로부터의 연락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보통 어린이집에서 알림장 외 연락을 취하는 것은 아이가 놀다가 다쳤거나, 갑자기 열이 나거나 등 영 좋지 않은 소식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니터 하단에 반짝반짝 빛나는 '카톡' 알림을 보면서 내 심장도 같이 벌렁거렸다.
원장선생님께서 보내온 소식은 아이가 아픈 것보다도 어찌 보면 더 충격적인 뉴스였다.
"어머님, OO이랑 같은 반 친구 두 명이 모두 다음달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돼서 저희 어린이집이 다음달 까지만 운영을 하고 문을 닫게 됐어요. 대기가 있으면 좀 더 운영해 보려고 했는데 어렵게 됐네요. 다른 어린이집 결정되시면 알려 주세요."
아이는 25개월이 된 작년 말 아빠의 복직을 1주일 앞두고 단지내 가정어린이집에 처음 등록했다. 최소 일주일은 어린이집을 거부하며 울고불고 할 것이라는 많은 경험담과 달리 놀랍게도 우리 아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고 첫날부터 선생님,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너무도 잘 적응했다. 선생님들께는 100점짜리라는 극찬을 받았고 3일만에 점심식사, 일주일 만에 낮잠까지 완료하며 복직하는 아빠와 출근하는 엄마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아이가 외향적인 덕분도 있겠지만 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섬세한 케어 덕분도 컸으리라 본다.
사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 나는 애착육아 책을 읽으며 비록 맞벌이 가정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가정보육을 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만 세돌 이전 아이에게는 아무리 좋은 기관보다 부모 품이 더 좋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툭하면 터지는 어린이집의 이런저런 사건사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등원거부를 겪고 심하면 등원 후에도 엄마만 찾으며 울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퇴소하게 된다는 사연까지 들으니 걱정은 더 컸다. 심지어 우리 아이는 18개월에 걷고 두돌이 넘어서도 의미있는 단어를 몇 개 하지 못하던 '느린 아이'였다. 느린 아이 상당수는 어린이집 활동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고 친구들 사이에 끼지도 못해 소외되다 결국 엄마가 일을 그만두고 반강제 퇴소하는 경우도 있다길래 등원 전날까지 이런저런 염려로 잠을 설쳤다. 어릴적 어떤 기관이든 적응을 못해 늘 겉돌고 꾀병을 부리며 등원, 등교를 거부했던 내 어린시절도 짐을 더했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내가 아니었다. 우리 아이는 등원하자마자 친구들을 찾으며 놀이에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새삼 친구는 저렇게 그냥 가서 같이 놀자고 하면 만들어지는 거였는데 왜 나는 어릴때 아무도 친구사귀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어른들을 원망했던 게 생각났다. 역시 자식은 겉 낳지 속 낳는 게 아니라고 하던가. 원아수가 10명도 되지 않는 소규모 가정어린이집이었지만 매주 다양한 특별활동과 요리, 산책, 만들기, 오감놀이 등 다양한 활동으로 아이를 놀아주시는 것도 감사했다. 우리 아이는 어린이집에 등원하자마자 발달에도 자극을 받은 건지 아님 그냥 때가 돼서인진 몰라도 석달만에 갑자기 문장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고, 언어치료도 정상 발달 수준으로 올라왔다며 종결 판정을 받았다. 말이 트이니 아이는 미주알 고주알 어린이집 친구들 얘기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말한 문장은 "ㅁㅁ(여자 아기 친구)가 좋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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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잘 다니며 우리 부부 맞벌이 생활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던 가정어린이집이 갑작스럽게 문을 닫게 된 것이다. 나는 하던일을 잠시 중단하고 나와 원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원장선생님의 말씀은 원래 대기 원아가 늘 있었는데, 올해는 원아모집이 되지 않아 대기중인 아이도 없고 현재 재원중인 아이들도 우르르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돼 결국 우리 아이랑 다른 여자아기 한명만 남게 된다는 것이었다. 원장선생님 역시 매우 착잡한 심경이실 것 같아 더 이상 캐묻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뭔가 위로를 할 만한 입장도 아니기에 다른 어린이집을 알아본 뒤 연락을 드리겠다 했다.
뉴스에서 연일 시끄럽게 보도되는 저출산의 타격이 비로소 내 생활 속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나름대로 대단지인 우리 아파트는 비록 구도심이라 젊은 신혼부부 비율이 아주 높진 않아도, 아이 키우기에 나쁜 조건은 아니어서 예전에는 그럭저럭 원아모집이 잘 되던 모양이었다. 우리 단지에만도 두 곳의 가정어린이집이 있었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그 소식을 듣고 퇴근하는 길에 보니 단지내 다른 가정어린이집도 철거 중이었다. 더이상 아기 울음소리를 듣기 어려운 나라에서 어린이집들은 문을 닫고, 그 여파는 결국 우리처럼 아이를 키우고 있는 가정들에게 오롯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장선생님과의 전화를 끊고 나는 바로 남편에게 SOS를 쳤다. 어린이집이 곧 문을 닫는다니 얼른 근처 다른 어린이집을 알아놔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 부부는 그날 업무를 하면서 틈틈이 집근처 어린이집에 전화를 돌렸다. 3세(보육나이 1세반) 후반에 학기중이라는 너무나도 애매한 시점에 우리 아이가 들어갈 만한 어린이집은 많지 않았다. 일단 가정어린이집은 만 2세(4살)까지만 다닐 수 있어 제외했다. 우리집은 아이가 5살이 되는 해 상반기 이사를 갈 예정이라, 만약의 경우 5살 초반까지도 어린이집을 보낼 수도 있기에 굳이 두 번 전원을 하느니 처음부터 오래 다닐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게 나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주변 민간어린이집들에 전화를 거니 아예 애초부터 만 2세반(4살)부터만 등록 가능한 곳들이 많았다. 사실 우리 부부 중 한명이 집에 있다면 어차피 당시가 10월이었으니 몇 달 집에 아이를 데리고 있다 다음해에 등원시키면 됐다. 하지만 우리는 맞벌이 부부여서 단 일주일이라도 보육 공백이 생기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또 패스. 집에서 도보거리에 있는 민간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5살반도 생길 예정이지만 아쉽게도 만1세(3세)반 정원이 꽉 찼다는 소식이었다.
많은 부모들이 선호하는 '국공립 어린이집'은 모두 집에서 차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리에만 있었고 대부분 차량도 운영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수백명대의 대기가 걸린 상황이었다. 애초부터 국공립만 선호하지 않았기에 상관은 없었지만 새삼 민간 어린이집들은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고 국공립은 여전히 수요 대비 부족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계속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렇게 종일 일하랴 전화 돌리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집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애매한 거리의 민간 어린이집 한 곳에 정원이 남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 주에 상담 일정을 잡았다. 이제 아이도 의사표현이 좀 가능하니 아이를 데리고 상담을 받기 위해 평일 저녁으로 잡았다. 며칠 뒤 헐레벌떡 일을 마치고 아이를 하원시켜 데리고 상담을 하러 갔다. 가정어린이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고 놀이기구도 많아 아이는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문제는 거리였다. 아이가 걸어가기엔 먼 거리라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버스 노선상 거의 10시가 다 돼야 우리 집에 오는 상황이었다. 아침에 등원시키고 출근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연말까지만 친정엄마의 등하원 도움을 받을 예정이지만, 그 이후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렇게까지 해서 일을 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급 몰려왔다. 워킹맘 유지는 너무나도 장애물이 많았고 살얼음판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렸다. 결국 나는 이런 일들이 겹쳐 일을 그만두는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불안함과 아쉬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갑자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집 근처 민간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이었다. 우리 아이 또래 아이들이 갑자기 상담신청을 해 와서 다 모으면 신규 반을 하나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우리 단지 내 문을 닫던 다른 가정어린이집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문 닫은 어린이집 출신 아이들과 새로 들어온 아이들 몇 명이 더 모여 반이 생겼고 우리 아이는 기적적으로 가정어린이집 폐원 후 집근처 민간어린이집으로 옮겨 무난히 적응했다. 아이는 그렇게 좋다 하던 이전 어린이집의 여자동생 아기는 하루만에 싹 까먹고, 이번엔 들어간 지 한달만에 같은 반 또래 여자친구랑 손을 잡고 다니며 "◇◇이랑 결혼할거야"라고 하는 녀석이었다. 나 역시 걱정했던 대로 퇴사를 하지 않고 현재까지 맞벌이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간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에 대해 다소 냉담한 입장이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 한들 먹고 살기 척박해서 애를 낳지 않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고, 어차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과밀국가가 아닌가? 인구 좀 줄면 그 나름대로 낫지 않겠나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뭐 쉬운 문제인가? 애 하나 사람으로 키우려면 엄마 아빠가 인생을 오롯이 갈아 넣어야 하는 현실이고 돈도 보통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니 아이가 '사치재'가 된 시대에 출산을 결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현명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저출산으로 인한 여파가 나의 경력단절 '위기'로 이어질뻔한 상황까지 겪은 것이다. 이제 아이를 키우는 이상 사회의 미래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곧 내 아이가 겪을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과 직결되는 문제기도 한 것이었다.
이제는 친구들과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우리 아이에게 앞으로도 많은 친구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비혼과 비출산을 신념에 의해 결정한 이들을 질책하라는 뜻이 아니다. 내 주변만 해도 많은 친구, 동료들이 결혼과 출산을 원하지만 현실적 여건으로 미루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아이가 있는 삶과 없는 삶이 완전히 같을 수만은 없겠지만, 그 간극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어린이집 한 곳이 덜 문을 닫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