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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나도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남편과의 연합' 먼저

by 뚜벅초


입덧이 막 끝나갈 즈음인 12주차 때, 불안과 걱정을 잔뜩 끌어안은 채 동네 상담소를 찾았다.

처음 방문한 날 사전설문지에 기재하는 고민거리에는 '출산을 앞두고 개인적인 가정사로 인한 트라우마를 고치고 싶다'고 썼던 것 같다.

내가 다녔던 상담소는 주로 아이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던 곳이라, 사실 등록하지 전까지도 여기가 내게 과연 적절할까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어차피 나도 태어날 아이에게 내가 겪은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는 것이 상담의 진짜 목표였기 때문에 목적과 아예 어긋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도 내 생각은 맞았다.

나를 담당했던 상담 선생님은 일반 성인상담과 함께 부부상담을 주로 하는 분이셨는데, 그래서인지 상담 시간의 상당 부분을 나와 남편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상담 첫 시간과 두번째 시간은 부모의 만성적인 불화, 지금까지 현재 진행중인 부모님의 경제적인 문제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의기소침했고 또래집단과 어울리는 방법 자체를 몰라 겉돌고 따돌림당하고 이리저리 치였던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더 끔찍했던 건 지옥같았던 학교생활을 엄마에게 겨우겨우 털어놓으면 '왜 그렇게 당하고 사느냐'는 호통만 돌아와서 마음 둘 곳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엄마 역시 아빠와의 만성적인 불화와 생활고로 독박 육아, 가사뿐이 아니라 사실상 독박 돈벌이까지 해야 하는 신세였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겠지만, 애정과 방임이라는 '냉탕과 열탕'을 오가는 정서적 불안은 아직 미성숙한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너무 힘겨운 환경이었다. 역시 가장이 되기에는 너무 어리고 자유분방(?)했던 아빠는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밤을 새우고 집에 오면 술주정을 하며 자신의 열등감과 분노를 무분별하게 표출했다.

자연히 이런 환경에서는 가족구성원 중 누구도 차분하고 애정어린 대화라는 걸 하지 않았으므로 차분한 어조로 타인을 존중하며 대화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없었다. 나에게 대화란 비난, 분노, 적대시, 경멸이 일상적이고 당연한 패턴이었다.

어릴적 나는 굉장히 소심하고 조용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대화를 할 일이 생기면 뾰루퉁하고 비꼬는 투로 답하거나,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빠지면 갑자기 활화산처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내곤 했었다(이렇게 갑자기 화를 내면 나를 평소에 만만히 보던 아이들이 갑자기 눈치를 보며 호의적으로 변하던 것도 이런 패턴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가 됐다).

조금씩 머리가 크고, 사춘기가 되고, 가정에서 보낸 시간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는 내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뒤늦게 직감하게 됐고,

결국 나는 가정에서 배웠어야 할 '남을 배려하는 대화 방식'이나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내 의견을 말하는 방법'을 조금씩 연습하고 배워나갔다.

내가 참고로 한 것은 부모나 가족이 아닌 학교에서 평판 좋은 아이들, 서점에 있는 자기계발서 등이었다. 성격에 대한 지적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건 20대 중반이 넘어서였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이 물었다. "지금 남편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결국 태어날 아이가 보고 자랄 환경은 나의 부모가 꾸렸던 내 원가정도, 남편의 원가정도 아닌 나와 남편이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가정인 것이다.

아이를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내가 어릴 때 겪었던 혼란을 다시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부모가 꾸렸던 혼란스럽고 분노가 일상적인 가정이 아닌 화목하고 서로 존중하는 가정을 만드는 게 제일 먼저라는 것이다.

"태어날 아이와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려면 먼저 부부가 '단단한 연합체'가 돼야 해요. 많은 엄마들이 남편과의 관계에서 불화를 겪고 그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전가시키거나 제대로 애착을 갖지 못하거든요."

생각해 보면 엄마의 혼란스러운 행동도 남편과의 불안정한 관계에서 왔었다. 아직까지도 이혼과 '그냥 참고 살기' 사이에서 갈등을 수십 년째 반복하며 그 하소연을 나한테 하고 있는 우리 부모님은 자신들의 문제로 감정이 상하면 내가 별 잘못을 하지 않아도 표정을 굳히고 싸늘한 말투로 신경질을 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눈치만 극도로 발달했고, 만성적으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습관적으로 죄책감을 갖는 성격이 됐다.


jv11724082.jpg 출처: 게티이미지


천만 다행스럽게도 남편과 나의 관계는 '아직까지는' 아주 좋은 편이다. 아직까지는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우리가 부부가 된 지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고 앞으로는 변할 것 같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그 공은 대부분 천성적으로 유순하고 배려심이 많은 남편의 덕분이다. 많은 여자들이 '나한테만 잘하는' 남자가 좋다고 하고, 나 역시 결혼 전에는 남편의 이런 면이 혹여 단점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 실제로 싸움이 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가식이 아닌 진짜로 착한 성품은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 친구들에게도 배려가 몸에 밴 착한 남편은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기거나 가치관이 엇갈려도 내가 겪어온 원가정의 패턴과는 다르게 차분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대화로 해결이 가능했다.

많은 신혼부부들의 싸움 원인이 되는 집안일 분담 또한 남편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오히려 서로 하려는 분위기다. 나 역시 딱히 남편에게 미루기보단 내가 할 수 있는 건 먼저 하려고 한다.


이렇게 착하고 성실한 남편과 함께 대체로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누리고 있는 나였지만,

항상 '언젠가는 나로 인해 이 행복이 깨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첫째는 항상 남편에게 먼저 불만이 생겨 화를 내는 건 거의 내 쪽이었고,

화가 나면 내 부모가 그랬듯이 내 스스로의 감정을 못 이기고 극단적인 말까지도 내뱉어버려 싸움이 커져버리는 패턴 때문이었다.

둘째는 '자식은 흔히 부모의 팔자를 따라가게 마련'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결혼준비 때부터 자주 들어가기 시작하던 주부 커뮤니티에서는 신혼 때 결혼생활이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살아 보면, 아이 낳아 보면 달라지고 다른 부부들처럼 싸움을 반복하다 이혼 얘기까지 나오게 되기 마련이므로

미리 행복을 감히 장담하지 마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주부 커뮤니티가 아니더라도 가정환경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든 결혼 후에 티가 나고, 보고 자란 게 그 모양이기 때문에 자기 부모와 똑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혼 상대자의 가정환경을 무엇보다 중요시해야한다는 말들이 다수의 동의를 받는다. 그런 이들은 가정환경이 나쁘거나 부모가 이혼한 사람은 결혼 상대자로 제외해야 하며, 가정환경을 이유로 가족의 결혼을 반대해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고, 애초에 가정환경이 화목하지 못한 사람은 애꿎은 남의 인생 망치지 말고 알아서 비혼을 선택해야 양심있는 선택으로 평가한다.

이런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나 역시 지금 남편과의 행복하고 화목한 일상은 일시적인 행복에 불과하며

자식을 낳으면 머지않아 내 부모를 따라 부부싸움과 습관적 분노, 짜증을 일삼다 결국 파국에 이르는 것이 순리일 것이므로 전혀 기뻐할 단계가 아닐 것이다.


상담 선생님께 내 우려점을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정말 단호하고, 확실하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다.

첫번째 불안에 대해서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극단적인 화를 내게 되는 것은 고쳐야 하고, 고칠 수 있다고 했다.

"스스로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는 아주 어리고 약한 상태일 때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 노출돼 있다 보니 자아가 위축되고, 그래서 늘 '불안'을 강하게 느끼는 성격이 되었을 거에요. 그래서 남편과의 사소한 갈등으로도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 나는 언제나 작은 위기에도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미리부터 앞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저 타고난 천성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릴때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이 됐을 수 있다고 하니 내 탓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과정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화가 나면 있는 그대로 분노를 표출해야만 솔직한 건 줄 알았던 내 믿음이 사실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남편과 사소한, 때로는 사소하지 않은 일로 다툼이 생기면 나는 그 감정을 그대로 표하고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마구 퍼붓는 나는, 감정이 상하면 일단 즉각적 반응을 피하고 화를 가라앉힌 뒤 차분하게 대화를 하려 했던 남편이 답답하고 약간은 기만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있는 화 없는 화 다 끌어 내다 결국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하던 부모를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알게 모르게 그분들의 화법을 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관계에서 잘못된 믿음 중에 하나가 '속에 있는 말을 무조건 다 해야 한다'는 거에요. 물론 느끼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분노를 있는 그대로 쏟아부으면 상대방은 그저 '공격'이라고 받아들일 뿐이죠. 화가 나면 일단 대화를 멈추고 화를 가라앉힌 뒤 차분하게 원하는 바를 말하는 습관을 지금부터 들여야 해요."

화가 나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 그대로 말을 하지 않고 심호흡을 세 차례 함으로써 감정적 열기를 먼저 육체적으로 가라앉힌 뒤 화가 가라앉으면 그 때 대화를 이어가라는 것이었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이날 상담을 한 뒤 심호흡 후 대화 이어나가기/갈등의 소지가 있는 대화 소재가 나왔을 때 일단 바로 말을 하지 않고 대화를 중지하기 등을 해 봤더니 앞에서 말했던 패턴의 싸움을 거의 하지 않게 됐다.


그렇다면 두번째 불안은? 부모의 팔자를 자식인 나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걸까?

이 역시 근거없는 믿음이라는 게 선생님의 말이었다.

원가정에서 어머니는 생활고, 남편과의 불화로 자녀와의 애착을 건강하게 형성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 내가 꾸린 가정은 그때와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많은 것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을 일이 일어나란 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무엇보다도 지지적인 남편이 있기 때문에 상황이 훨씬 낫다는 조언이었다.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가지세요. 달라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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