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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이유(離乳)-부모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몸만 '독립'이 아닌 마음으로 독립하기

by 뚜벅초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는 호시탐탐 독립을 꿈꿔 왔고 몇 차례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첫 번째 독립 시도는 정규직으로 취업을 했던 26살 때였다.

사실 대학생 때도 편도 1시간 반이 넘는 통학거리에 지쳐 자취를 꿈꿔왔지만 경기도 신도시 지역이라는 애매한 위치 때문에 명분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가자니 당장 돈이 없었다.

결국 처음으로 자취 아닌 자취를 하게 된 건 26살 때 회사 근처 고시원에서였다. 출퇴근을 못 할 정도로 먼 건 아니었지만 야근이 지나치게 많았고, 월급이 고작 100만원 남짓이었지만 밥이 나오고 주말마다 집에서 반찬을 가져오면 된다는 생각에(점심은 회사에서 줬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고시원 숙박을 시작했다.

하지만 월급의 거의 절반을 숙박비로 지출하는 생활은 오래지 못했고 결국 6개월만에 좀 더 통근이 편한 직장으로 이직을 하면서 나의 첫 독립 시도는 수포로 끝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되는 가정불화와 부모님의 사업 실패, 급기야 생활고에 쫓기다 못해 다단계 영업에 빠진 부모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그 길로 직장 근처 여성전용 고시원으로 다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십 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원래부터 무릎이 좋지 않았던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을 매일 오르내리다보니 어느날 갑자기 다리가 퉁퉁 부어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돼 결국 그 부모님께 SOS를 쳤고 꼼짝없이 집에서 통근을 하게 되고 말았다. 나는 여전히 계약직으로 알바를 하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신세였고, 월급은 150만원을 넘지 못했다. 준비 안 된 독립의 처참한 실패였다.


그렇게 약 2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 본가에서 취업준비와 알바를 병행하며 생활했지만 여전히 취업만 되면 집을 떠나리라는 결심은 더욱 굳어져갔다. 항상 화목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며 겉으로라도 정상가족의 틀을 유지했던 원가정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자 서로 아예 말을 섞지 않을 정도로 냉랭해졌고, 이런 틈바구니에서 정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던 동생은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집에서 잠만 자는 방식으로 다른 가족들과 거리를 뒀고 낮 시간은 아르바이트와 학원, 주말은 스터디 등으로 집에 있는 시간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취업에 성공했으나, 나는 어느 토요일 갑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던 동생이 내 방으로 뛰어들어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바람에 그날로 바로 원룸을 알아봤고 다음날 용달을 불러 이사를 갔다. 내 얼굴에는 피멍이 들었고 엄마는 동생을 말렸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혼내거나 처벌하지 않았다. 이 가정에서는 내가 보호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4년 후 결혼해서 신혼집으로 이사올 때까지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을 나온 덕분인지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월급을 2배로 주는 다른 직장으로 이직하게 돼 생활고 문제도 없어졌다.


상담 선생님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털어놓았더니, 뜻밖에도 자취를 결정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무기력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고 같은 폭력이 반복되게 마련인데, 바로 결단력 있게 독립을 한 것은 정말 자아가 강하다는 증거에요. 그대로 있었다면 반드시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더 심해졌을 거에요. 그리고 집을 나온 것 자체가 동생에게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가 됐을 거에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을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된 원가정과 다시 인연이 이어진 건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흔히 결혼을 원가정으로부터의 완전 독립이라고 생각하나, 결혼이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닌 가문과 가문의 결합인 한국 사회에서는 예외였던 것이다.

물론 양가 분위기가 비슷한 상황이라면 모르겠으나, 부유하진 않아도 화목한 남편의 가족들은 틀림없이 나의 가정환경을 유심히 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나다를까 처음 인사를 간 날에도 남편의 부모님은 나 자신보다 우리 부모님이 '뭐 하시는지'를 먼저 물어봤다.

나는 내 잘못이 아닌 가정불화라는 결점으로 인해 괜히 편견을 뒤집어쓰기 싫었고 결혼 후에도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겉으로나마 정상 가족을 열심히 연출했다.

한 자리에 죽어도 앉기 싫다며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리는 부모를 각각 설득해 어렵사리 상견례 자리에 동석시키고 혹시나 '못 배운 애'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 최대한 공손한 모습과 예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온갖 절차와 예의범절을 열심히 검색하고 사전 조사했다. 물론 내가 딱히 잘못하지 않아도 며느리들은 종종 시댁에 흠이 잡힐 수 있다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 알게 됐다.

더군다나 가부장적 결혼질서 하 '시월드'라는 낯선 세계에서 그나마 약자인 며느리의 우군이 되어줄 수 있는 건 든든한 친정밖에 없다는 걸 주변 지인들의 결혼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깨달으면서, 나는 겉으로나마 부모님과의 화해를 시도하게 됐다. 물론 막상 결혼생활이 시작되니 친정 부모보다는 남편의 역할이 더 절대적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다행히 남편은 그 역할을 아주 잘 하고 있어 더 이상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크게 받지 않고 있다).


그렇게 감정적 앙금은 그대로지만 어줍잖게(?) 표면적으로 부모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나는 결혼 이후부터 부모가 주는 감정적 스트레스에 간헐적으로 시달렸다.

가끔씩 소액을 빌려달라는 부탁(우리 부부는 결혼과 함께 월급통장을 합쳐 함께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용돈 외에는 동의 없이 목돈을 사용하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나에게 서로를 비방하며 편을 들어달라고 은근히 강요하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때로는 사위 앞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였다.

상담 선생님은 새로운 가정을 꾸렸으니 원가정과는 독립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내내 강조했다. 즉, '정서적 이유(離乳)'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 엄마 젖을 먹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이유식'을 먹으며 젖을 떼듯이 성인 자녀도 부모와 단단하게 이어진 감정적 결합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자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jv11239295.jpg 출처:게티이미지


그렇다. 나는 29살에 자취방 '세대주'로 법적·경제적 독립에 성공했지만 정신적 독립은 아직 완전히 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던 부모를 늘 원망하면서도 한켠으로는 그들의 삶도 불쌍하다는 생각에 연민을 거두지 못했고, 서로를 비난하는 부모 앞에서 듣기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각자의 편을 들어주며 감정적으로 불씨를 지피는 데 장작을 넣어주기도 했다. 내가 이제 경제력을 갖게 되었으니 대출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부모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해주지 못하는 점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소액의 돈을 빌려주고,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건전한 소비생활로 돌아가는 걸 방해했던 것이다.

상담을 받던 중에도 엄마는 몇 차례 대부업체에서 빌린 대출금의 이자를 갚아야 하는데 당장 돈이 없다며 며칠간 소액을 빌려달라는 메시지를 급하게 보내기도 했다. 사실 액수로 치면 줄 수도 있는 금액이었지만, 그러기엔 평소 별 생각 없이 쇼핑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서 섣불리 송금할 수 없었다.

상담 선생님의 솔루션은 단호했다.

"많은 착한 딸들이 엄마와 감정적으로 끌려다니고 있어서 배우자를 비난하는 엄마에게 세뇌되며 자존감이 낮아지고는 해요. 하지만 배우자를 비방하는 부모 앞에서는 '그러지 마시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해요. 무분별한 소비로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부모님에게도 습관적으로 돈을 빌려주면 안 돼요. 주정뱅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둔 아내가 폭력이 무서워서 계속 술을 사다주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폭력을 더 가중시켜서 아내가 결국 주정뱅이의 '조력자'가 되는 원리와 마찬가지에요. 자녀가 주체가 되어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야 해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찝찝함에 시달렸다. 혹시나 엄마가 사채업자에게 쫓겨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영화같은 상상까지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남편과 통장을 공유하고 있어서 어렵다'는 이유로 엄마의 요청을 거절했다. 엄마는 다소 실망한 듯했지만 며칠 뒤 안부 전화를 해 보니 다행히도 돈은 잘 해결이 됐고, 경제적 상황도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때 큰돈을 벌고 싶어 시작했던 다단계 사업들도 접고 이제는 4대보험이 가입된 직장에서 일을 하며 조금씩이나마 정상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상담 선생님의 예측이 맞았다. 애초에 내가 했던 고민들은 지나친 수준이었으며 그 돈은 빌려주지 않았더라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다. 또 임신 이후에는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습관적으로 서로를 비난하려 하는 부모에게도 단호히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다'고 해도 부모님은 예상 외로 화를 내지 않았고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훨씬 적어졌다.


원가정과의 '감정적 이유'는 남편에게도 과제였다. 결혼 전까지 대학교 기숙사 생활과 군대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부모님의 품을 떠나본 적 없던 남편은 아이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신혼집이 어색하고 나와의 결혼생활이 마치 여자친구와 여행을 온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법적으로는 결혼했지만 심정적으로는 아직 원가정에 속해 있던 것이었다. 전통적 며느리 도리를 은근히 바라는 시댁분들의 모습에 나는 알게 모르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이럴 때 친정이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점은 열등감이 되어 더욱 서러웠다. 그런 내 모습에 남편 또한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남편과 매번 상담한 이야기를 공유했고 남편 역시 원가정이 아닌 결혼으로 꾸려진 나와의 현 가정을 1순위로 삼는다는 점에 동의해서 감정적 서운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


결혼준비, 신혼생활을 하며 찾아본 수많은 SNS와 주변 지인들의 경험담 속에 늘 등장하는 '친정은 사랑'이라거나 '힘들 때는 그래도 친정밖에 없다', '아프니까 엄마가 해 준 따뜻한 밥이 생각났다', '친정엄마가 귀찮을 정도로 많이 챙겨준다'는 말들을 들으면서 부러움과 자격지심에 시달릴 때도 많았다. 막말로 나는 남편과 사이가 나빠지면 대체 어디에 기대야 할까. 결혼한 여자도 결국은 친정밖에 없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럼 대체 누구한테 기대야 하나 싶어 공포심이 들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친정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 또한 부부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게 상담 선생님의 견해였다. 선생님의 내담자 중에 심한 부부갈등을 겪던 남자분이 있었는데, 부부싸움만 하면 친정으로 아이들을 데려가서 남편을 비방하는 아내 때문에 아이들까지 아빠에게 이유 없이 적대감을 갖고 침을 뱉을 정도로 심한 행동을 했다는 사례도 들었다.

우리 엄마 역시 결혼 초기 남편과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내 손을 끌고 근처에 있는 친정으로 가 며칠간 있다 오는 생활을 반복했었다. 물론 아빠의 술주정과 폭언도 한몫했지만, 그 때문인지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아빠에게는 알 수 없는 거리감과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아무래도 친정이나 시가는 객관적이지 않고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갈등의 해소보다는 격화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부부간의 갈등과 문제는 부부 안에서 끝나야지 원가정의 힘을 자꾸 빌리다 보면 자녀들까지도 한쪽 편으로 휩쓸리게 하는 결과를 부른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로 나는 '든든한 친정'을 가진 여자들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게 됐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게 됐다. 대신에 원가정에서도 받지 못했던 사랑과 지지, 때로는 단호한 조언도 아끼지 않는 남편을 만난 것에 감사하고 새로운 가정을 단단하게 꾸리는 데 더 집중하게 됐다. 무엇보다 나와 함께 '좋은 아빠되기' 준비에 열심인 남편을 보며 '남자친구'였을 때와는 다른 사랑과 유대감이 생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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