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두 돌 무렵 또래보다 발달이 많이 늦어 병원과 발달센터를 순회한 적이 있다. 병원에서 추천해 준 한 유명 발달센터를 찾아갔는데 보호자와 아이들로 대기실이 인산인해였다. 얼마나 용하길래 병원에서도 추천하고 손님도 이렇게 많나 싶어 기대를 했다. 상담실에 앉아 아이에게 비치된 장난감으로 말을 걸었다. "(공룡 장난감을 가리키며) 이건 뭐야~?" "(경찰차 장난감을 가리키며) 여기 빠방이도 있네~ 이건 무슨 빠방이지?" 그런데 대뜸 상담 실장 선생님은 그런 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하셨다. "지금 애가 무발화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무발화 애들한테는 따라하기 쉽게 '멍멍' '꿀꿀' 이런 식으로 의성어와 의태어로 자극을 주셔야 해요. 그렇게 놀아주니까 애가 지금 적절한 자극을 받지 못해서 많이 늦은거에요. 그리고 아이가 사람보다는 사물에 관심이 많은데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하셨어요?" 난데없는 공격(?)적인 멘트에 나는 (아마도 그분이 의도하신 대로) 팩트로 뼈를 맞고 어질어질하다기보다는, 그냥 어이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21개월짜리 아이를 두고 집에서 아침에 눈뜨면서 밤에 자기 전까지 거의 하루종일 쉬지 않고 온갖 의성어와 의태어를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원에서는 이미 (다른건 다 늦어도)사회성 만큼은 최상위 수준이라며 자폐스펙트럼 등의 가능성은 없다는 확진을 받은 상황이었다. 보다못한 남편이 집에서 이미 충분한 자극을 주고 있다고 반박을 했고, 우리는 결국 그 센터에 등록하지 않았다. 우리가 등록한 다른 센터는 (비록 손님은 아까 그 곳보다 적어 보였지만) 나의 양육방식에 이런저런 추측을 하지 않고, 그냥 어린 아가니까 충분히 자극을 주면 금방 좋아질 거라며 용기를 주신 곳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허무할 정도로 고작 반년여 만에 갑자기 문장으로 말이 트여 모든 치료를 종결하고 말았다. 지금은 또래 이상으로 수다쟁이가 되었다. 사회성은 소심한 나보다 10배는 더 좋은 것 같다.
바야흐로 '팩폭(팩트폭행)'에 열광하는 시대다. 팩폭인지 언어폭력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송곳처럼 뾰족한 말을 마구 던지면 청취자들은 뼈를 맞았다면서 마구 충성을 날리는 시대다. 그래서 발달센터도 유튜버도 연예인도 입시 강사도 팩폭이라는 미명 하에 날카로운 말들을 던진다. 듣는 입장에서는 과연 저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대다수의 대중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며, 자기 삶을 반성하게 됐다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돈도 갖다 바친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팩폭에(맞는 말이라면 수긍은 하지만) 크게 감명받는 편이 아니라, 가끔은 나만 빼고 온 세상이 몰래카메라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한때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살아도 괜찮다'며 힐링이 유행이더니 이제는 너도나도 갓생 살아야 한다며 채찍질 하는게 유행이다. 어차피 유행이란 돌고 도는 거니 또 금새 팩폭 유행도 한물 갈 게 불보듯 뻔하긴 하다. 그러나 우려되는 부분은 팩폭이라고 공유되는 말들이 상당 부분 그냥 폭력에 불과한 경우가 다수란 것이다. 폭력에 어느 때보다도 민감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팩폭'이라는 가면을 쓰면 그냥 쉽게 용인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폭력이 폭력이 아니게 될 리 없다. 그래도 맞는 말이니 괜찮지 않냐고? 너도 뼈 맞아서 찔려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대부분의 팩폭은 딱히 '팩트'도 아니다. 애초에 인생은, 세상사는 그렇게 무 자르듯 선악과 정답이 구별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감히 인생의 정답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한 분야에 오래 천착한 전문가들은 오히려 그런 극단적인 결론짓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많이 알 수록 쉬운 정답을 내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말 '팩트'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밍숭맹숭하고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직업상 전문가들을 꽤나 많이 만나봤는데, 평생을 금융계에 종사한 난다긴다 하는 전문가들조차 일반인이 최고의 수익률을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소득을 늘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일단 그분들 당사자조차 퇴사하고 전업 투자자가 되는 게 아니라 노동소득을 열심히 벌고 있다는 게 가장 확실한 근거가 아닐까) 그러나 유튜브의, 블로그의, 오픈 카톡방의 얼굴없는 자칭 전문가들은 너무 쉽게 '네가 가난한 건 니가 공부를 하지 않고 회사의 노예처럼 월급에만 안주하기 때문'이라고 쉽게 다른 사람의 삶을 재단해 버린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자신에게 돈을 주고 '부자가 되는 비법'을 얻어가라는 것이다.)
육아계는 더욱 심하다. 그렇지 않아도 자존감 내려가기 일쑤인 육아를 하는 부모(특히 엄마)들을 쉽게 후려치며 불안감을 조성하는 게 아주 공식처럼 통용되고 있다. 특히나 아이가 발달이 늦거나 학업성취도가 다소 떨어지거나 하면 이는 더욱 공공연해진다. 자녀의 부족함은 무조건 엄마 탓이라는 게 평균 대중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마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런 팩폭을 가장한 폭력은 더욱 잘 먹혀든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아이의 모습에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엄마들은 이런 '팩폭'에 뼈를 맞고 눈물을 흘리며(사실은 언어폭력에 가스라이팅을 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돈을 갖다 바친다. 그리고 더 많은 팩폭, 아니 가스라이팅을 해 달라고 요청한다. 참으로 웃픈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재밌는 건 이런 팩폭을 하는 사람들은 딱히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란 거다. 자녀에게 공부를 덜 시키는 엄마는 자녀를 미래의 패배자로 만들려고 방임하는 건데, 자녀를 열심히 공부하도록 독려하는 엄마는 '본인은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 했으면서 애만 들볶는' 극성 맘X이라고 꾸짖는다. 이쯤 되면 애초에 이들의 의도는 팩트전달이 아닌 그냥 가스라이팅(과 수금)임을 눈치채야 하지만 그게 인식될 정도면 가스라이팅이 덜 된거겠지. 많은 육아와 자녀교육 관련 '팩폭' 콘텐츠를 찾아보면 한결같이 엄마를 '학교 다닐 때 공부 안 하고 못 배워서 탱자탱자 놀다가 지금은 시집 가서 남편 돈으로 놀고 먹으며 애만 잡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일단 우리 세대 엄마들의 대학 진학률은 80%가 훌쩍 넘은지가 한참 됐는데 언젯적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고, 영어수학을 넘어 제2외국어까지 전문가 수준인 엄마들도 내 또래엔 정말 많다. 못 배우고 무식하고 욕심만 많은 '아줌마상'을 멋대로 그려넣고 마구 내뱉는 것이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 건 잘 배우고 열심히 살고 아이 학업뿐 아니라 정서까지 꼼꼼히 챙기는 엄마들조차 차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스라이팅에 넘어가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팩폭과 갓생의 시대가 낳은 결과물은? 바로 최근 엄청나게 급증한 정신의학과다. 국회 보건복지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정신과 진료를 받은 사람은 80만명이나 늘어났다고 한다. 정신과도 77%나 늘었다. 우리의 '이성'은 팩트로 강하게 무장되었다고 생각(착각?)하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라며 비명을 지르고 괴로움에 몸부림친다는 방증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오래 일하고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서로를 날카로운 말로 찌르고 괴롭히며 더 잘 살아보자고 난리다.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새마을 운동으로 절대빈곤에서 벗어났을지 몰라도,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시대에 이런 식의 '노력'은 그냥 정신질환의 온상에 불과할 뿐이다. 어차피 경쟁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승자가 될 수 없으며, 한 분야에서 승자라면 다른 분야에서는 상대적 패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팩폭러' 들은 한 부분만 부족해도 마치 인생 전체가 망한 것처럼 난리를 치며 상대를 인생 패배자로 규정한다.
게다가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이해를 못 하는건지 안 하려 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신 앞 모은 돈이 없는 청년은 부모님이 아프셔서 하루 벌어 병원비를 내고, 가족의 생활비를 일부 책임지며 학자금을 갚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팩폭' 받아 울고있는 전업 엄마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 석박사와 굴지의 대기업을 다녔지만 아이에게 정서적 문제가 있어 모든 걸 내려놓고 육아에 전념하느라 자기개발을 잠시 내려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당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가난한 노인은 자녀가 희귀병에 걸려 평생 수억원의 약값과 치료비를 대느라 투잡에 쓰리잡까지 뛰어도 집을 팔고 빚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가 극단적이고 드문 사례라고 생각이 든다면 아직까지 별 일 없는 당신과 주변에 우선 감사하라. 세상에는 당신이 감히 상상하지 못한 다양한 변수가 넘쳐나니 말이다.
그리고 팩폭으로 마음이 불편해지고 자신이 못나 보이는 분들께는, 그래도 괜찮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드는 감정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의 다양한 입장에 대한 통찰이 없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결여된 사람이 하는 '조언'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정확도가 높을지 상당히 의구심이 든다. 그러니 일단 그런 사람들이 제공하는 유료 강의나 책이나 스터디나 단톡방 같은 데 결제를 하기 전 한번만 더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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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한테 맞아서 뼈 부러지면 엄연한 폭행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