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0년 만에 접속한 옛 블로그에는 위의 글에 등장한 포스팅 말고도 다른 글이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10년 뒤의 내 모습'이 글의 제목이었다. 이전에 올린 글에 나오는 2013년 글보다 더 이전인 2010년에 남긴 글이었다. 휴학을 하느라 동기들보다 1년 정도 졸업이 늦었는데, 당시 대학 졸업을 앞두고 급격하게 나빠진 집안 형편과 취업이 잘 되지 않는 전공 탓에 방황하는 동기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다.
다소 낯뜨겁지만 13년 전의 내가 '10년 뒤(그러니까 현재 무렵)'를 예측한 내용을 요약해서 공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문과인 덕분에 졸업은 쉽게 하고 작은 출판사나 언론사에 들어가서 1년 정도 돈을 번 다음에 모아둔 돈으로 북유럽으로 여행을 간다. 다녀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졸업 후 프리랜서로 글을 쓰며 취미 생활도 하고, 많은 돈을 가지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간다. 아마 연애는 못해봤을거고 결혼도 못했을테니 해외에 살면서 부모님의 결혼 압박을 피해야 할 거다. 명품백도 없고 차도 없지만 면허는 있을 것 같다."
2023년 현재 시점에서 이 중 맞은 것이라곤 졸업 후 소규모 언론사에 다녔던 것 말고는 딱히 없다. 북유럽은 여태 가본 적도 없고 대학원도 안 갔으며 면허도 없다. 대신 결혼하면서 산 명품백 몇 개는 있고, 어쩌다보니 엄마가 생각하는 결혼적령기에 결혼도 해서 딱히 압박을 받을 일도 없었다.
글을 쓸 당시에는 오히려 2010년 버전의 목표가 더욱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을테고, 2013년의 목표 설정은 다소 비현실적이고 불확실하다고 생각되기 쉬웠을 거다. 물론 사회 경험이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외에는 별로 없던 24살과, 사회 생활을 그래도 좀 해본 27살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다 도찐개찐이다. 어떤 목표는 맞았지만 어떤 목표는 틀렸다면, 내가 생각하는 미래를 글로 쓰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 10년 전 내가 쓴 목표가 몇 년 안에 모두 달성된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처음에는 나도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히 그 당시의 상황을 되새겨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2010년 글을 쓸 때 나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앞서 얘기했듯 졸업을 앞두고 불투명한 미래로 혼란스러웠으며, 원하는 기업에 척척 붙는 이공계 지인들과는 달리 같은 과 동기들은 중소기업조차 가지 못해 대학원으로 도피하거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모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부모님 사업이 망해서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고 여전히 사회성이 그리 좋지 않아서 연애는커녕 친구도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낙담한 마음으로 '나는 대략 이렇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었다.
반면 2013년 글을 쓸 때는, 당시 나는 '감사일기'를 매일 쓰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먹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작은 즐거움이라도 발견하고 기록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당시 블로그에 남겼던 글은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반려동물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며 가족들을 사랑하는 내용들이었다. 실제 당시 나의 삶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면, 작은 매체에서 100만원 남짓의 월급을 받으며 인성이 그리 곱지 않은 상사들의 갑질을 견디며 고통스럽게 출퇴근하는 날들이었다.(심지어 자기 자녀의 허드렛일을 나에게 맡기는 사람도 있었다. 요즘 같으면 직장 내 갑질로 신고 대상이겠지?) 공채를 준비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공부에 몰두하지도, 직장에서도 그리 성과를 내지도 못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이겨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행복들을 애써 찾고 있었다. 점심밥이 맛있었다든가, 반가운 친구와 만났다든가, 집에 가니 반려동물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든가...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는 잘 될 것'이라는 마음을 눌러써서 담았다. 물론 긍정적인 마음먹기를 위한 노력은 아마도 오래가지 못한 모양이다. 이후 취업준비 기간은 이런저런 이유로 무한정 늘어졌고 가정 환경은 더욱 나빠져서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몹시 나빠져서 온갖 못 볼 꼴들을 다 봤기 때문이다. 딱히 나아지지 않는 상황을 보면서 '이런 노력도 다 소용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비록 10년 전 나의 긍정적인 마음먹기 노력은 몇달 안에 끝나고 말았지만, 그때 눌러썼던 마음은 몇 년 후에 현실로 돌아와 나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고, 또 10년 후 세파에 찌든 30대의 나에게 다시 발견돼 이렇게 새로운 영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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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수시로 앞일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걱정한다. 어떤 목표는 성공하지만 대부분은 보기좋게 실패한다. 이를 두고 '노력을 안 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은 묫자리가 나빠 조상신이 안 도와줘서, 사주 팔자에 없는 일이라,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돼서, 부모를 잘못 만나서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정치인을 잘못 뽑아서 헬조선이라서 등등 다양한 이유를 댄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종종 우리는 진심으로 원하는 게 아니더라도 '나는 이 정도면 족할 것 같아서'라며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곤 한다.
명문대 가면 좋기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X등급이니까 QQ대 정도로 가는 걸로 목표를 잡자. OO회사를 들어가면 좋겠지만 명문대를 못 나온 나한테는 언감생심이니까 적당해 보이는 ㅁㅁ회사라도 들어가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진짜로 원하는 목표를 쓰는 것보다는 다소 덜 행복한 마음으로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QQ대도 떨어지고 ㅁㅁ회사도 떨어지고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일까 하면서 더 스스로를 낮춰잡는다.
이는 모두 내 얘기다. '현실적'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은 꽤나 염세적인 나는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목표로 잡았다. 실패했을 때의 주변의 시선이 싫었고 나 스스로 느낄 자괴감이 두려워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고 그렇게 현실적인 목표조차도 번번히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더 나를 낮췄고 목표는 번번히 빗나갔다. 그러는 사이 다소 대책 없어 보이던 주변의 낙관주의자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꿈을 이루고 있었다.
노력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자기 처지를 감안한 '현실적' 목표를 세우면 마음에 부담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력도 적당히 하게 된다. 적당한 노력으로는 다만 뒤처지지 않을 뿐 인생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기엔 역부족이다. 우리가 인생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말도 안 되어 보이는 목표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의미 있는 수준의 움직임을 감행하게 한다.
원하는 것을 쓰기 전,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혹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물론 꿈의 크기에 정답은 없다.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기준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하는 많은 이들은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나를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꿈이 결국 현실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별로 와닿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10년전 블로그 속 명백한 증거로 남아 있는 과거의 기록들을 보니 이제는 그런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