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행복을 끌어당기는 방법

by 뚜벅초

행운과 목표 달성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나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10년 전의 나는 나 자신만 성공하면 됐지만, 이제는 나 자신보다 소중한 아이가 생긴 상황. 내 목표를 모두 달성한다고 해도 아이가 행복하지 못하면 이는 모두 무의미했다. 하지만 내 아이의 행복과 성공을 내가 '끌어당길' 수 있을까? 며칠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던 끝에, 문득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학원을 운영했던 엄마 대신 외조부모님 댁에서 6세까지 자랐다. 할머니가 키운 아이들은 엄마 사랑을 못 받아서 버릇이 없고 외롭다는 편견에 개인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그런 편견과 달리 내 기억 속 그 시절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아주 편안하게 자랐기 때문이다.


까다롭고 예민한 나의 기질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시던 외할머니였다. 3살에 읽고 쓰기를 시작한 나를 보며 ‘영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할머니는 나의 단점마저도 특별한 아이만이 보이는 ‘옥의 티’로 생각하시며 그 어떤 손주보다도 나를 아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셨지만 그 당시 분들치고는 이례적으로 고등교육을 받고 교단에 선 적이 있으며,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기도 했던 분이셨던만큼 교육열도 남달랐다. 나에게 책을 읽어주시고 이것저것 가르쳐 주셨다.

6살 유치원생이 되어 엄마 아빠가 사는 집으로 돌아와 가난과 가정불화, 학교폭력에 시달리며 안타깝게도 나는 우울하고 위축된 아이로 변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조부모님 댁에서 받은 사랑은 잠재의식 한켠에 자리잡아 나를 단단하게 지켜줬던 것 같다.


학령기와 사춘기 시절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을 했지만, 결국 마음을 잡고 그럭저럭 평범한 사회인으로 자라나게 된 것은 어쩌면 어릴 때 조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나에 대한 신뢰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두 분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 지 오래 됐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언제나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는 요인이 된다.


나도 아이를 낳고 엄마가 돼 이런저런 육아 정보를 찾다 보면 간혹 ‘아이에게 지나친 칭찬을 삼가라’는 조언을 보게 된다. 내가 양육 전문가는 아니기에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엔 주제넘지만, 어릴적 할머니는 내게 ‘지나친 칭찬’을 참 많이도 해 주셨다. 그리고 그 칭찬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게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남은 것 같다. 상황이 어떻든,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 없이 내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감 말이다.


반면 할머니에 비해 우리 엄마는 ‘조건부 칭찬’을 주로 해 주셨다. 흡족한 성적을 받으면 아낌없이 칭찬해 주셨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받으면 비난이 날아왔다. 조건부 칭찬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 된다.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성적과 스펙과 자산과 능력이 있어야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내세울 게 없으면 열등감으로 변해버리는 감정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취업준비생이 된 나에게 병상에 누워 있던 할머니는 “작가”라고 하셨다. 우리 엄마는 얘가 무슨 작가냐며 할머니가 이제 정신이 좀 오락가락한 듯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그 말에서 할머니의 나에 대한 ‘무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나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받든, 나의 능력은 충분히 훌륭하다는 것. 나의 글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할머니의 애정 어린 평가였다.


사본 -pexels-pixabay-235554.jpg 사진출처 : pexels


할머니의 ‘지나친 칭찬’을 너무 많이 들은 덕분인지 나는 유독 글에 있어서만큼은 근자감이 있는 편이다. 학창시절 교내외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을 했는데, 시험을 망치면 엉엉 울었지만 글짓기 대회는 떨어져도 이상하게 속이 상하진 않았다. 그냥 심사위원의 취향과 내 글이 맞지 않았겠거니 싶었다. 다른 친구가 나 대신 상을 받으면 친구에게 질투가 나기보다는 어떻게 썼는지 궁금했고, 내 글에 본받을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전교 1등을 한 적은 없지만 전교 1등보다 글을 잘 쓴다는 나만의 자신감도 항상 있었다. 그 덕분인지 학교 대표로 상을 받은 적도 제법 있다. 어른이 되어 언론사 필기에서 수십 번을 떨어져도 ‘아직 때가 안 됐을 뿐’이라고 믿었고, 결국 수 년을 노력한 끝에 필기시험에서는 떨어지지 않게 됐다. 어쨌거나 아직도 글을 쓰면서 10년넘게 먹고 살고 있다. 초년생 시절 시험삼아 가입신청해 봤던 브런치 작가에도 한 번에 통과됐는데 알고 보니 나름대로 진입장벽(?)이 있다는 걸 알고 꽤나 놀랬다. 지금도 언젠가 나는 책을 낼 것이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남들이 인정해주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앞선 글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글 쓰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근자감이 다소 부족한 편이다. 자신감을 가지려면 근거가 필요했고 그래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스펙, 이를테면 미용체중이라든지 그럴듯해 보이는 명품이라든지 번듯한 회사 간판, 브랜드 아파트 등을 갖지 못하면 조바심과 열등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미 그걸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그들과 나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선을 그었다. 마치 고정된 상태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심리적 장벽은 결국 정말로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되고 만다. 그러다 기회가 찾아와도 잡지 못한다. 잘 되는 사람은 계속 잘 되고, 안 풀리는 사람은 영영 안 풀리는 이유다.


우리는 모두 자녀가 행복하게,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갖추기 위한 ‘향상심’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가슴 한 켠에 있어야 한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한 번의 실패를 ‘역시 난 안 되는 사람’이라고 과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때가 아니다’라며 재도전을 향한 시행착오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최대한 많은 칭찬을 하기로 했다. 아직 아이가 어리기에 이는 별로 어렵지 않다. 사실 모든 부모에게 자기 아이는 천재처럼 보이지 않는가. 천재까진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임은 분명하다. 괜히 아이가 거만해질까봐, 혹은 거친 세상에서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 그 마음을 꽁꽁 숨기지 않고 마음껏 표현해주면 된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가치있고, 대단한 존재라고! 그 말들은 아이의 마음 한켠에 쌓여 앞으로 세상에서 겪을 수많은 풍파를 헤쳐나갈 잠재력이 될 것이다.


만약 자녀가 없다면, 앞으로도 자녀를 둘 예정이 없다면? 그리고 내게는 그런 사랑을 베풀어 준 사람이 없다면? 당신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되어라. 나 역시 폭풍 칭찬을 해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내 스스로 나에게 그 역할을 해 주고 있다. 다소 근거가 부족해 보일지라도 당신은 충분히 가치있는 사람이며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그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헀을 뿐이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이성'의 힘이 자꾸 그 말을 튕겨낼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칭찬 세례를 더 쏟아부어라. 걸음마를 막 시작한, 글자를 막 읽기 시작한 사랑스러운 손주를 바라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이 되어, 실수조차 귀여운 시행착오일 뿐이라고 생각해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정말로 사랑스러워진 스스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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