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만나, 스프링타운

깨고 싶지 않은 꿈

by 뚜벅초


살다 보면 이런저런 긴 설명을 하기 난감할 때가 있다.
나의 처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합리적으로 보이는 설명을 해야만 하는 게 압박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내게는 십여년 전 엄마와 살던 집에서 뛰쳐 나왔을 때가 그랬고,
그 후로도 왜 가족들과 함께 살지 않는지, 명절엔 어디로 가는지 등을 물어보는 의례적 질문을 받을 때가 그랬다.
어떤 관심도 버거운 그런 날에는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가 주기를 바랄 때도 있다.
그럴 때 듣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단 이것 뿐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북극곰이 말했다.
어디서 왔는지 묻는 그에게, 잘 모르겠다고 하자-북극곰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 무심함이 아주 따뜻하게 느껴진 건 그냥 나의 기분 탓일 뿐일까.

탁, 하고 북극곰이 내 앞에 접시 하나를 놓았다.
"카페에서 새로 준비하고 있는 메뉴인데 맛 좀 볼래?"
어느새 그는 나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나이조차-1살인지 10살인지 100살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북극곰에게 뭐라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어서인지 기분이 나쁠 것도 없었다.
접시 위에는 빨간 과일잼이 얹어진 파이 한 조각이 따끈한 기운을 뿜어내며 놓여 있다.
"친구가 라즈베리 농장을 하는데, 제법 맛이 좋더라구. 그래서 올 봄엔 라즈베리 파이를 좀 구워볼까 해. 정식 메뉴로 내놓기 전에 특별한 손님에게 내어 주는 거야."
특별한 손님이라고?
곰은 얼른 먹어보라는 듯이 턱을 씰룩였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 포크를 들어 파이를 조금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하게 졸여진 라즈베리 잼이 바삭한 파이와 입 안에서 섞였다. 비록 잼의 형태였지만 콧속을 가득 채우는 향이, 아주 신선한 라즈베리를 썼음을 알 수 있었다.
"아, 맛있네요."
곰이 씨익 웃었다. "후후, 그 녀석이 좀 덤벙거리기는 해도 항상 먹을만한 라즈베리를 만든다니까. 아, 역시 곰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예의 그 끼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갈색의 털을 가진, 조그만 라쿤 한 마리가 들어왔다.
"어때, 내가 키운 라즈베리 맛은? 얼른 파이 구워줘!"
"그럴 줄 알고 미리 구워놨지. 여깄다."
라쿤은 내 옆자리에 앉아서 곰이 대접하는 라즈베리 파이를 받았다. 그리고는 포크 가득 한 조각을 잘라 와앙 입으로 넣고는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이야, 이건 역시, 내가 키운 라즈베리도 훌륭하지만, 우리 마스터의 파이 굽는 솜씨 덕분에 더욱 훌륭해졌군!"
그리고는 -이제서야- 옆 자리에 앉은 나를 보고는 물었다.
"엇, 못 보던 분이네. 여기로 이사온 건가? 아니면 마스터의 친구?"
"아뇨, 이사를 온 건 아니고...그러니까 어쩌다 들렀어요. 여기는 오늘 처음이구요."
곰이 말했다. "우리 카페에 오는 사람은 다 내 친구지."


친구라.
오랫동안 친구 없이 살았다.
혼자 살기 시작할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딱히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학생 시절에는 같이 점심을 먹거나 조별 수업을 할 때 적당히 어울리는 아이들은 있었지만, 학교를 나가면 다시 볼 일 없는 그런 사이로 지냈다.
동창회니 뭐니 하는, 각종 경조사에도 갈 일이 없었다. 직장에서도 주어진 일을 할 뿐 의례적인 대화 외에는 하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 쪽에서 먼저 막아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나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그 날 곰의 입에서 나온 '친구'라는 단어는 낯설다 못해 작은 충격이었다. 발끝에서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라쿤이 말했다.
"오, 그래? 딱히 할 일 없으면 우리 농장에 놀러올래? 와서 라즈베리도 좀 먹어보고 말이야. 점심은 내가 대접하지."
"아.. 좋아요. 마침 라즈베리가 아주 맛있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승낙하고 말았다. 맞아, 라즈베리는 아주 맛있었어.
옆에서 곰도 거들었다. "둘이 간다면 나도 좀 이따 같이 가자고. 가게 문은 잠시 닫고."


갑작스러운 라즈베리 농장 방문단은 그렇게 꾸려졌다. 라쿤의 라즈베리 농장은 곰의 카페에서 숲 안쪽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니 모습을 보였다. 초록의 이파리들 사이로 빨간 라즈베리 열매들이 나란히 숨어 있다. 마치 봄날에 보는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모습이다.

"슬슬 배가 고파지니 일단 점심부터 먹을까?"

라쿤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타탄 체크 무늬의 매트를 꺼내 농장 바닥에 넓게 편다. 그 위에는 동그란 접시에 치아바타 샌드위치 세 개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밀크티가 연두색 잔에 담겼다. 물론 농장에서 갓 딴 라즈베리도 한 바구니 곁들인다.

"올해는 볕이 좋아서 라즈베리도 잘 익었어."

"음, 그러네. 아주 달콤하고 맛있어. 아, 물론 작년의 라즈베리도 훌륭했지만 말야."

농장 위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에는 솜털같은 구름들이 드문드문 떠다니고 있다. 온통 초록색 풀과 빨간 라즈베리, 파란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시야를 가리지 않는 풍경이다.

어느새 접시가 싹 비었다.

"아, 잘 먹었다. 이런 날에는 역시 누워서 하늘을 바라봐야 해. 누워있다 보면 잠도 솔솔 올 거고..."

라쿤은 이렇게 말하더니 벌러덩 그 자리에서 누웠다. 곰은 어느새 가방에서 작은 페이퍼백 책 하나를 꺼내 읽고 있다.

"이봐, 너도 딱히 할 일 없으면 나처럼 누워서 구름이나 구경하자고."

라쿤이 권유했다.

오늘 처음 만난 이들 앞에서 벌러덩 드러눕는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여럿 일어났다. 그러고도 이렇게 편안하니까,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벌러덩 라쿤의 옆에 누웠다. 사실은 식곤증이 조금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정말 작은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아? 그런데 사실은 정말 그래...."

왠일로 라쿤이 조용해졌나 했더니 쿨쿨 자고 있다. 곰은 여전히 독서 중이고.

때마침 나도 졸음이 쏟아진다....





'딩 디디딩딩 딩딩~'

낯익은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파란 하늘 대신 자취방의 천장 모서리다.

현실로 돌아왔다. 오전 7시1분. 출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간만에 너무 행복한 꿈을 꿨다. 꿈이어서 아쉬웠던, 깨고 싶지 않았던 꿈...

다시 꾸고 싶은 꿈을 꾼 건 처음이다.

출근을 해서 사무실에 앉아 어제와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스프링타운의 하늘이 떠올랐다. 북극곰의 카페에서 맡은 달콤한 향기, 라쿤의 농장에서 먹은 라즈베리의 새콤한 맛... 구내식당의 멀건 김치국물을 삼키면서도 내내 꿈 속의 그들을 그리워했다.

별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꿈에서라도 좋으니 스프링타운에 한 번 더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봐, 너무 깊이 잠든 거 아냐? 벌써 저녁때가 다 됐다구."

나를 흔들어 깨우는 낯익은 목소리. 라쿤이다.

눈을 뜨니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붉은 다홍빛으로 물들고 있고 북극곰은 옆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다.

"많이 피곤했나보네. 그나저나 너도 고양이 할머니네 가서 저녁 먹을래?"

아, 돌아왔다. 스프링타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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