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남자가 집에서 애 보면 병 나"

아빠 육아휴직을 본 조부모님의 반응

by 뚜벅초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면 이상증상을 겪는 주인공을 두고 남편이 육아휴직을 결심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결심하기가 무섭게 지영에게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지영의 시모는 "어떻게 앞길이 구만리 같은 남편한테 육아휴직을 시키냐"며 "생각이 짧다"고 호통을 친다. 우리 부부 역시 내 휴직이 끝나면 남편이 곧바로 휴직을 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나 역시 저렇게 '야단'을 맞지 않을까 걱정됐다. 시댁 반응이 무서워서 접을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무엇보다 남편 본인이 바라는 바기도 하고) 딱히 잘못한 것도 없이 욕을 먹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밝히긴 어렵지만 우리 시댁 역시 시골에 사시는 분들이고 가부장적인 보통의 기성세대 마인드를 갖고 계신 분들이다.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의 사상을 타인이 바꾸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믿는 편이라 무슨 '투쟁'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많은 며느리들이 그렇듯이 앞에서는 다소 부당하더라도 "네, 네"하고 뒤에서는 남편과의 협의로 적정선을 찾는 방식의 삶을 살고 있었다. 신혼 기간이 짧고 바로 임신과 육아를 거치느라 시댁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겨 부딪힐 일도 적은 편이었다.


그래도 남편이 자그마치 1년이나 육아휴직을 하는 걸 비밀로 할 수는 없는 터였다. 아마 통보는 남편이 한 것 같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시부모님이 내게 전화를 걸어 싫은 소리를 하시거나 반대를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휴직 전 남편과 아기를 데리고 시댁에 갔는데 아버님이 반 장난으로 남편을 툭툭 치시면서 "으이그 한심한 놈"이란 식으로 말하는 걸 슬쩍 듣기는 했다. 아마도 멀쩡한 아들놈이 일은 안 하고(?) '집에서 놀면서 애나 본다'고 하니 한심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가 특별히 잘못한 건 없으므로 그냥 넘어갔다.


woman-g0556e14b9_1920.jpg 출처 : pixabay


잠깐, 일은 안 하고 '집에서 놀며' 애나 본 건 나도 지난 1년 3개월간 했는데? 이래서 전업주부 며느리들은 시댁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건가? 별 탈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긴 했지만 묘하게 뒷맛이 씁쓸해졌다. 아, 물론 나는 지난 육아휴직 기간 동안 살면서 '이보다 더 열심히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빡센 시간을 보냈다. 주말도 없이 휴일도 없이 24시간 각성상태로 아이의 보초를 서며 의식주와 건강, 발달을 모두 책임지는 건 정말 보통 각오가 아니면 못 할 짓이었다. 남자가 해도 한심한 짓이 아니라 떠받들어야 마땅한 일이지 싶다.


의외의 반응은 우리 부모님이었다. 아빠한테 안부전화를 하면서 복직하면 애는 누가 보냐는 질문에 "남편이 1년 휴직하기로 했다"하니 정말 '깜짝' 놀라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어떻게 애를 보냐." 우리 엄마 역시 사위를 기특해 하면서도 "남자는 성격상 밖에 나가 일을 해야 편하지 집에만 있으면 병 나"라며 걱정했다. 물론, 1년 넘게 집에서 육아를 하다가 병 났던 나와 달리 남편은 아직까지 별 다른 문제 없이 전업 육아를 하는 중이다.


사실 우리 부모님도 그렇고 시부모님도 그렇고, 육아를 엄마가 거의 도맡아 한 전통적인 한국 가정의 모습으로 젊은 날을 보냈다. 양가 모두 아주 넉넉하지는 않은 탓에 어머니들도 젊어서부터 일을 했는데 시댁의 경우 할머니(남편의 친할머니)가, 우리 엄마는 친정엄마(나의 외할머니)께서 손주들을 돌봤다. 나는 생후 18개월때부터 6살까지 아예 외갓집에 살면서 할머니를 주양육자처럼 생각하며 자랐다. 젊은 남편보다는 늙은 양가 어머니가 육아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게 우리 부모님 세대의 '상식'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남편의 육아휴직이 어느 가정에서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만큼 여전히 많은 가정들이 아빠 육아보다는 할머니 육아를 선택하고 있다. 육아휴직 자체를 안 내주는 직장도 많고, 가능은 하지만 '앞길이 막힐까봐' 무서워서 못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또 엄마의 경력이 이미 단절됐을 경우 '무벌이'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엄마가 육아를 도맡아 하고 아빠는 돈을 버는 형태밖에 선택지가 없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런 걸 제하고도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애 보는 건 좀'이라는 고정관념은 우리 대에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나 역시 우리 아이가 나중에 육아휴직을 내고 직접 아이를 돌본다면 말리게 될까? 너무 먼 미래라 지금은 감히 상상조차 잘 되지 않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잘 했다며 응원하게 될 것 같다. 나 역시 1년간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의 주양육자로 지내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만큼 내 아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고 진짜 부모로 거듭나는 시간이 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기도 나중에 자라 자식을 갖게 된다면 단순히 법적으로의 아빠가 아닌 진짜 보호자로서 아이와 상호작용하는 경험을 꼭 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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