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라서 할 수 있었던 육아
나의 임신과 출산이 모두 정석대로 별탈없이 이뤄졌던 것과 달리 육아는 돌발변수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몸은 건강했지만 문제는 발달이었다. 돌전 뒤집기부터 또래보다 조금 늦었지만 어떻게 사람이 다 똑같은 속도로 크나 싶어 그냥 뒀다. 전문가들도 6개월까지만 하면 된다길래 그 직전에 한 우리 아이는 어쨌거나 정상이긴 하니까 걱정할 것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 지나고 나선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요즘 애들은 다 빨라서 8~9개월에도 한두 발짝을 내딛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반면 우리 아기는 돌잔치를 끝내고 서너 달이 지나서도 전혀 걸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말도 전혀 못 했다. 오히려 돌전에는 '음마, 아바' 같은 소리를 곧잘 내더니 어느 순간부턴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나름대로 임신 때부터 육아서를 탐독하고, 육아우울증에 찌들어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유튜브 동영상 한 번 안 보여주고 다양하게 직접 놀아줬는데도 아이의 발달은 내맘같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결과였다. 사실 나는 아이가 신생아 시절만 해도 말 늦은 아이는 부모가 자극을 제대로 주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학교 성적까진 어떻게 못 하더라도 제때 걷고 말하는 정도는 알아서 당연히 되는 걸로만 알았다.
결국 우리는 아기를 데리고 지역 대형병원 발달클리닉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첫 진찰의 결론은 대근육과 언어가 늦으니 염색체 검사를 비롯한 여러 정밀검진을 받아 보자는 것. 하지만 아직 아기가 두 돌도 되지 않아 어리고 지연의 정도도 아주 심하지는 않으니 놀이치료 정도를 받으면서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는 진단을 받았다. 고작 18개월의 어린 아이다 보니 치료를 받기도 마땅찮았다. 겨우겨우 사설센터에서 놀이치료를 받기는 했지만 너무 어려서 이렇다 할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그보다 우리 아이를 본 다수의 전문가들은 "집에서 부모가 몸으로 많이 놀아 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와 더 많이 놀아주면 될까, 지금 돈 벌겠다고 일을 하는 게 맞나,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듯했다. 일도 전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내가 빨리 퇴사하고 남편을 복직시켜서 아이 발달에 올인하는게 정답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덜컥 퇴사를 감행하기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 중 하나는 아이의 발달치료가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도 모르는데 막대한 센터비용을 외벌이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였다. 동네 복지관에선 대기가 너무 길어 사설 센터를 갔더니 놀이치료 40분에 8만원을 내야 했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단순 언어치료, 놀이치료 같은 건 그나마 10만원 안쪽이지만 아이 개월수가 더 차고 만약 추가적인 발달지연이 일어날 경우엔 한번에 수십 만원의 금액을 내야 하는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들 했다.
어차피 지금은 남편이 휴직 중이라 집에서 온종일 주양육자로 아기를 돌보고 있으니 굳이 내가 당장 퇴사를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퇴사할지 여부는 내년에 남편이 복직할 때까지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 대신, 지금까지 발달 문제에 한 발짝 떨어져 있던 남편은 더 적극적으로 개입에 나섰다. 남편은 아이한테 무관심했다기보단 '그냥 좀 늦을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까지 걱정이냐'는 입장이었다. (신기하게도 느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을 보면 대부분 엄마들은 약간의 지연에도 마음을 졸이는 반면 아빠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것 같다.) 아무튼 남편은 15개월까지도 혼자 서지도 못하던 아이를 데리고 매일 하루 한두번씩 동네 공원을 돌아다녔다. 아기는 양손을 잡고 걷고, 한 손을 잡고 몇 걸음을 걷고, 한두달이 지나자 드디어 한 발짝씩 몇 걸음을 혼자서 떼기도 했다. 비가 오면 주변의 저렴한 키즈카페를 찾아 몸놀이를 시켰다. 두어달만에 아기는 누가 잡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여기저기를 아장아장 돌아다녔다. 또래보단 좀 늦지만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걸음마를 시작하니 언어 모방도 다시 하기 시작했고, 손가락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동작도 잘 하게 됐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곧잘 알아듣고 심부름도 잘 하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 코로나 유행 속에서 집에 갇혀있던 아이의 잠재력은 아빠의 노력과 함께 다시 피어났다. 남편은 나보다 체력이 좋아 밖에서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아이를 콘트롤하며 하루 두어번씩 산책을 시키고도 집안일을 할 수 있었다. 키즈카페에서도 나는 금방 지쳐버리는 반면 남편은 아이를 따라다니며 아이가 지칠 때까지 함께 놀아줬다.
운전을 잘 해서 여기저기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시켜준 것도 큰 장점이다. 남편이 직장을 다닐 땐 주말, 휴일이 따로 없어 여행을 다니기도 마땅치 않았는데 이제는 나만 시간을 맞추면 언제든지 사람이 붐비지 않는 시간대를 선택해 떠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만약 내가 퇴사를 하고 남편 대신 아이를 돌봤다면 오히려 야외활동에 제약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자주 신경질을 내고 불안이 많은 나와 달리, 느긋하고 침착한 남편은 아이에게 짜증을 왠만해서 내지 않았다. 아이의 발달이 신경쓰이면 금방 걱정과 불안에 잠겨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마는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좀 느리더라도 한 발짝 뒤에서 기다려주고 아이의 속도에 맞춰서 놀아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많이 반성하고 배웠다.
아빠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수록 아이의 사회성이 좋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부모를 닮아 다소 내성적인 성향의 우리 아기는 낯은 좀 가려도 다른 사람이나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는 않은 편이다. 돌전에는 조금만 낯선 곳에 가도 정신을 못차리고 울기 바빴는데 지금은 부끄럽다고 얼굴은 붉혀도 또래를 만나면 먼저 다가가 관심을 잘 보이고 처음 보는 장소와 놀잇감에도 호기심을 보인다. 아직 아빠육아의 결과를 논하기엔 좀 이른감은 있지만, 어쨌거나 아이의 발달 문제에는 무조건 '엄마의 퇴사'만이 답은 아니란 점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