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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식어가는데,마실 줄 몰라요

#7. 보려고 하면 생각이 멈춘다

by 생쥐양

내가 만약 직장인이라면 '주말 및 공휴일 알람 끄기' 설정을 해두었겠지만, 나는 그딴 거 필요 없는 어제가 오늘 같고, 한 달 전도 오늘 같은 고시생이기에 토요일 새벽도 어김없이 알람을 끄며 일어나 본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긴 호흡 두 번과 함께 고생하는 엄마 얼굴 한번, 멋진 정장 입고 한 손에 스타벅스 커피 한잔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며 무거운 몸을 침대 밖으로 끄집어낸다

누군가 그랬던 거 같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라고...

하지만 이불속에서 한두 시간 더 뒹굴어봤자 상쾌하기는커녕 자책감으로 하루를 망친다는 것쯤은 깨달은 '나는야 도인(道人)'이다

부스스한 머리를 모자로 가볍게 눌러주고, 복숭아 향 핸드크림을 발목까지 바르며 각질을 관리하는 모닝 루틴을 시작으로 집을 나섰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기 전,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굿모닝, 오늘 새벽 공기 시원하다. 이따 자기 보기 전까지 열공하고 있을게. 사랑해'


아직은 차갑지만 따듯해지는 아침 기운을 느끼며 핸드폰을 가방에 넣으려는데 밤새 확인하지 못한 문자 하나가 눈에 띈다

'오랜만이야... 번호 그대로인가 싶어서 연락해봤어. 얼마 전에 신우형한테 들었는데 고시 준비한다면서? 그때는 네가 미술에 관심 많고 그쪽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한 것 같은데 고시공부라니... 조금 놀랬고 너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 들었어. 그래도 너는 착하고 성실하니깐 잘 됐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다음 달에 호주로 유학을 가게 됐어. 3년 정도 있다 올 거 같은 데 가기 전에 너만 괜찮다면 얼굴 한번 보고 싶은데 답장 부탁해. 아니, 꼭 연락 좀 줘. 할 말도 있고...'


첫 문 장을 읽을 때부터 이 문자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예의 없이 꼭두새벽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툭 내 던지고 두 다리 뻗고 잠을 자고 있을 이기적인 그놈, 나의 첫사랑 김. 찬. 성


새벽 6시는 내가 몇 년 동안 잠을 이겨내며 사계절의 다른 아침 풍경을 마음속에 기록해두는 나만의 시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어도 감기 기운에 몸이 으슬거려도 하루를 시작하게 열어주는 책의 '머리글'이자 '추천사'이다. 책의 내용이 궁금하다고 그걸 건너뛰게 만드는 그 자식의 문자에 화가 났다.


그 간 만났던 남자들 가운데 단 번에 누군지 알아채는 나에게도 화났고, 지워버린 전화번호임에도 한 때 '내 사랑'이라 저장해두었던 애칭도 생각났다. 생각이 한 번 일어나자, 걷잩을 수 없이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놈의 얼굴, 거닐었던 캠퍼스 구석구석, 휴강 때면 먹었던 트럭 떡볶이, 주말 버스종점 데이트, 군대 후 이별...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언제나 "네", "오케이"를 외치고 다니는 무한 긍정 사나이였다. 나랑 데이트를 하다가도 "네, 형님 지금 바로 갈게요", 아는 누나가 기숙사 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면 "오케이 누나, 내가 해줄게"

이렇다 보니 핸드폰에는 저장된 지인 연락처만 200개,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울려대는 '카톡' 소리, 데이트하는 동안만이라도 진동으로 해둘 수 없냐고 부탁해봤지만 예스맨에게는 금연보다 어려웠나 보다. 헤어짐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헤어질 수 있는 기회는 만들어줬던 그날의 다툼을 끝으로 한 번도 마주친 적도 연락을 나눈 적도 없었다. 나만 보면 그놈의 행방과 안부를 묻던 선배들은 헤어진 후,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었다. 그나마 이 정도 표현은 '위로'였다 치지만, 간혹 내가 나타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흠흠'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건 정말 최악이었다.


이렇게 나의 남은 대학생활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고시생의 아침을 말아먹고 있는 그 자식의 안부 문자는 전혀 반갑지 않다.


헤어진 남자 친구와 친구처럼 지낸다는 그녀들, 헤어졌지만 좋은 기억만 남아있다는 그녀들, 전 남자 친구와 비슷한 스타일의 남자를 만난다는 그녀들과 나는 절대로 친해질 수 없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절교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간 공부한다는 핑계로 친구들과 만남이 뜸했고 연애도 하지 않았기에 누군가에게 그놈이 보낸 문자에 관해 흉보고 싶은데 들어줄 사람이 없다.


하... 마음은 답답한데 풀 곳이 없어서 코로 들어갔다 나가는 숨조차 버겁게 느껴진다.

'이럴 때는 그냥 걷자' 속으로 되니이며 마음의 무게를 발로 전해 본다. 비록 발걸음이 가볍진 않지만 그래도 속이 풀리는 것 같다. 감추어두었던 감정이 풀려 생각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는데 걷다 보니 이른 아침 도서관 쓰레기통을 비우시는 여사님, 매점에 식품들을 운반하는 기사 아저씨,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딘가로 향하는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책 제목처럼 생각이 멈추자 정말로 보였다.


아니다...

'보려고 하자 생각이 멈췄다'


그렇게 잔잔해진 마음으로 가볍게 벤치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뱉고서 답장을 보냈다. '잘 가라'


아침 7시부터 문을 여는 매점에 들러 비타민 음료 3병을 사고 수줍게 인사도 건네보았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시네요." "학생이 더 고생이지 머"

경비아저씨에게 한 병, 여사님에게 한 병, 나에게 한 병을 건네며 또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저 천 원짜리 음료수일 뿐인데 그분들은 천만 원어치의 덕담을 나에게 쏟아주시니 온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


'이게 내가 사고(buy) 내가 사는(live) 하루다. 이 자식들아'

미워하는 마음 내뱉고 나자 진짜 하루 시작됐다. 준비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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