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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식어가는데,마실 줄 몰라요

#8. 내 남자의 회식

by 생쥐양

오늘은 불금,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마시며 직장 스트레스 날리고 있을 누군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저녁 메뉴는 김밥 한 줄 대신 '육회비빔밥'으로 선택했다.

쭈뼛거리며 들어간 식당 안에는 넥타이 부대가 가득했다. 이제 막 월동준비를 마치고 봄을 기다리는 나와 달리, 6월의 뜨거운 태양을 맞이하고 있는 그들을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흘끗 훔쳐본 그들의 하얀 와이셔츠가 젖어있고 걷어올린 소매가 우직해 보이는 건 나만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글거리는 삼겹살 한 점 입에 넣고 맥주 한 모금 넘기면서 정치를 논하는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연주를 그저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과장님, 어제 그 건은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부장님, 그건 제 잘못이죠. 결국 정부 기획에 맞게 짰어야 했는데"

"자네들 어제 뉴스 봤지? 한 달 만에 또 바뀐 거잖아. 어차피 이래저래 했어도 욕먹었을 거야. 그나마 욕만 먹었으니 다행이지. 누구 하나 징계라도 받았어봐. 내 마음이 어땟겠나? 자자 다들 잔들고 우아하게 먹고 집에 들어가자고, 그래야 마누라한테라도 덜 혼나지, 하하"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그들의 전우애가 마냥 부럽기만 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나와 후배를 보더니 주인아주머니께서 "우리 딸도 4년째 취업준비 중이잖아. 많이 먹어" 하시며 신선한 야채와 금방 터질듯한 달걀찜, 한 두 번씩 얼굴을 내미는 두부가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를 주셨다. 보답의 인사로 남김없이 상추쌈도 해 먹었다. 이렇게 나의 볼록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밥심 채웠다고 칭찬도 해주고 소화 잘되라고 도서관 주변을 두 바퀴나 산책하였다. 상추를 먹고 나면 잠이 몰려온다는데, 카페인도 이겨내는 나는 '식곤증' 따위 없이 저녁 공부도 순조롭게 이어나갔다.


소리 없이 한참을 움직여대던 핸드폰이 '지 이이이 잉 지 이이이 잉' 적극적인 구애작전을 벌인 후에야 내 눈에 띄었다. 부재중 전화 2통, '나의 커피소년'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어디야?" 나의 쉼 없는 질문에 그는

"자기야, 혹시........?"

"뭐라고? 안 들려, 어디야? 어딘데?"

".... 밖으로 나왔어, 시끄러워서 안 들렸지? 내 말 들려?"

"응, 이제 잘 들려, 무슨 일인데? 무슨 일 있어?" 여전히 내 첫 질문에 대한 답을 못 들은 터라 난 여전히 취조 중이다.

"오늘 가게 사장님이 직원들이랑 회식하자고 해서 치킨집 왔어. 놀라게 해서 미안" 성질 급한 경찰관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자상한 답변을 하는 참고인에게 나는 마음이 또 뺏겼다.

"아... 그래서 시끄러웠구나. 난 또 사고라도 난 줄 알았네. 근데 자기 회식하는데 전화를 왜 이렇게 많이 했어? 진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아, 그게... 별거는 아닌데... 저기... 사장님도 나 연애하는 거 아시게 됐거든. 그런데 자꾸 누나를 보고 싶다고 부르면 안 되냐고 해서... 난 공부한다고 당연히 안된다고 말했지. 그런데도 성주 씨랑 혜원 씨까지 나서서 불러달라고 거의 애원을 하잖아. 안 되는 거 아는데... 그.... 혹시 잠깐 시간 될까 해서... 정 안되면 내가 다시 얘기해볼게."


'누나?'

지금껏 그를 만나 오면서 자기 꿈을 향해 달려가는 성실한 청년으로서 의지가 됐고 기댈 때마다 힘이 되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당황해서인지 미안한 마음 때문인지 수다스럽게 진심을 전하며 '누나'라고 부른다.


첫 만남 당시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물었던 통성명,

그러나 '나이'를 듣고는 더 어색해졌던 그와 나는 2살 차이 연상연하 커플이다. 그 사실을 잊고 지낼 만큼 그는 나를 '누나' 대접해주지 않았는데 뜬금없이 누나라니...

나 또한 그를 '동생'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회식자리에서 치킨 한 조각 뜯지 못하고 좌불안석인 그를 지켜주러 가야겠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그의 동료들이 궁금했다. 가끔씩 가게에 들릴 때마다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기에 이번 만남을 통해 주변인들을 탐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기도 하고 더 나아가 '내 남자'에게 눈독 들이는 동료들은 없는지 살펴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연상녀의 당당함을 어깨에 메고 회식장소에 가고 싶지만, 몇 시간 전에 상추쌈에 곁들여 먹은 마늘과 양파 향만큼은 나를 주눅 들게 하고 있다. 또한 가방 속에는 그 어떠한 화장품도 들어있지 않고 입냄새 제거용 가그린도 없다.

'복잡할 때일수록 간단하게 생각하자'

얼핏 주워들은 말이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고, 24시간 편의점에 들러 가그린 하나와 여행용 세안 세트를 샀다. 여자가 제일 예뻐 보일 때는? 세안 후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렇다.


떨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당당한 걸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사실 치킨은 배달로만 시켜봤지, 식당 안에 발을 디디는 건 처음이었다. 카페처럼 예쁜 조명과 소파들이 즐비해있어 '포토존'들이 많았고, 그중 한가운데 가장 길고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있는 '내 남자의 회식' 자리가 보였다


난 회사 ceo도 아닌데 나를 보고 벌떡 일어서서 아는 체를 하는 그를 따라 직장동료들이 모두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와, 애기로만 들었는데 너무 반가워요" 사장님의 멘트를 시작으로

"안녕하세요, 저는 가게에서 많이 봤죠?"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후 타임에만 일해서요"

"안녕하세요. 제가 엄청 보여달라고 졸랐어요"

"안녕하세요. 지훈 씨가 연애한대서 저희 엄청 놀랬잖아요. 저 집이 여기서 40분 거린데 택시 타고 왔어요. 너무 궁금해서"


"저도, 보고 싶었어요" 그에게 전하는 마음이기도 했지만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그의 직장동료들에 대한 감사 인사이기도 하였다.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치킨을 입에 넣으며 웃고 있는 그를 보니, '잘 왔네' 싶다.


누군가에게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 전우애를 나눌 수 있는 회식자리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삶의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 같다.

왠지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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