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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식어가는데, 마실 줄 몰라요

#9. 관객이 없는 인생 무대

by 생쥐양

나는 매일 다이어리를 쓰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계획하며 산다. 주로 그날에 끝마쳐야 할 공부나 들어야 할 강의 목록을 적는 게 대부분이지만 가끔씩 뒤적거리며 보게 되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써 내려갈 때도 있다.


첫 번째, 합격해서 최신 휴대폰으로 바꾸기

두 번째, 첫 월급으로 엄마랑 백화점 가서 비싼 옷 사드리기

세 번째, 찐한 연애를 결혼으로 골인시키기

네 번째, 태미...


나에게 '버킷리스트'란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이라기보다 지긋지긋한 도서관을 벗어나 합격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해나가야 할 책임감 같은 거다. 즉 내가 포기하지 않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놓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겠다. 잠깐 머리를 식히러 나와 다섯 번째 의무를 생각해내고 있는데, 아직 완성하지 못한 네 번째 항목이 마음이 걸린다.

나를 21살 대학생활의 여름방학으로 데려다주는 그 이름 '태미...'


"태미야, 이번 방학에 서울 갈 일 생겼어. 얼마 만에 보는 거냐 진짜."

"야야야, 웬일이야. 진짜? 하룻밤 자구 가. 너 오면 내가 서울구경 제대로 시켜줄게. 우리 학교 근처에 공유가 다녀간 파스타 가게 있거든. 거기 먼저 가고 그다음에는 조인성이~"

"하하하. 알겠어. 나 지금 수업 시작. 이따 연락할게"

세 번째 서울 방문이었지만 지하철을 탈 때면 긴장되어 출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혹여 내릴 곳을 놓칠세라 두 귀는 안내방송 언니를, 두 손은 지하철 노선도를 꽉 쥐고 있는데 잠이 쏟아진다. 집중할수록 잠이 오는 건, 설레는 마음으로 탄 고속버스 옆자리에 잘생긴 남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창가 쪽에 앉아있어도 느껴지는 그의 눈빛, 팔목까지 내려온 옷을 입고 있었어도 스쳐지는 그의 어깨가 2시간 동안이나 나를 깨어 있게 했다. 그가 정확히 서울남자인지, 광주 남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철을 자연스럽게 타는 모습만은 서울남자임에 틀림없다. 우린 결국 두 번은 볼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전의 낯선 남자와의 만남을 더듬거리며 기억하고 있자니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야야야. 끼약." 마중 나온 친구가 출구 앞에서 멍 때리고 있는 나를 잡아끈다.

"서울 진짜 멀다. 어머 뭐야? 너 그새 서울 여자 다 됐네. 너무 세련돼 보이는데?"

"나 여기서는 지방에서 올라온 거 티도 안나. 내일 예쁜 옷 가게도 구경하자. 아휴, 갈 데도 할 일도 너무 많다. 너 이틀 더 있으면 안 돼? 아 참 배고프지? 우선 머좀 먹자."

그렇게 고등학교 친구인 그녀와 나는 1박 2일의 일정 동안 쉬지 않고 걸었고, 구경했고, 먹었고, 마셨다. 그녀의 남자 친구도 소개받으며 그동안 못 나누었던 수다도 실컷 떨었다.

"태미야. 네 덕에 서울구경 진짜 잘했다. 너무 잘 먹고 잘 놀다가는 것 같아. 다음번엔 내가 쏠게. 고마워" 친구에게 문자를 남기고 고속버스에 올라타 운명 같은 옆자리 만남을 기대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두 시간이 넘게 두 다리 쫙 펴고 목도 꺾어주면서 자고 일어났더니 집에 도착이다. 하지만 친구의 답장은 도착 전이다.

늘 문자며 전화를 빨리 받아주는 친구였는데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답이 없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후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봉투를 뜯으면서 긴장된 마음이 드는 건 여자의 촉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얼마 전 서울에 와서 같이 지내고 간 뒤에 어떻게 말을 전할지 고민하다 편지를 쓰게 됐어. 그냥 솔직하게 얘기할게. 이틀간 내가 쓴 돈이 10만 원이더라. 난 너랑 친하다고 생각해서 그날 내 남자 친구도 소개해준 건데 밥 값 한 번 내지 않는 너를 괜히 소개해주었나 싶더라고... 솔직히 남자 친구 앞에서 창피했어. 네가...'

난 그 뒤의 글을 읽지 못했다. 눈물이 쏟아져 글을 읽을 수 없었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편지가 나한테 보낸 게 맞는지, 이 글을 쓴 사람이 그 친구가 맞는지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리고 진정되지 않은 나의 마음을 뒤로 한채, 서둘러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편지 잘 받았어. 태미야, 미안해. 미안하다.'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기억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기억은 또 다른 나를 만들어준다. 나의 경우엔 그날 친구의 편지 한 통으로 많은 게 바뀌었다. 만남의 관계에서는 받는 거 보단 주는 쪽을 선택하였고, 친구의 호의를 따져가며 선택하였고, 누가 나의 험담을 하는지 살피며 눈치를 보기 시작하였다. 물론 내가 바뀌게 된 게 전적으로 친구의 탓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나의 존재가 서서히 사라져 갔고 나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남아버린 '창피한 친구'라는 죄명은 벗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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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를 선망했었던 것 같다. 서울에 거주하며 멋진 남자 친구도 만나고 좋은 옷, 좋은 집에 사는 그녀가 부러웠었나 보다. 그런 친구를 잃게 되는 게 싫어서 화를 내고 싶었어도 애써 사과하며 관계를 이어 보고 싶어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안쓰러워서 그 죄명에서 벗어나고자 이제라도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도 크다.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던 그녀는 지금도 듣게 되는 소식에 의하면 좋은 직장에 다니며 돈 많은 남자와 연애 중이라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아등바등 헤엄치는 백조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이미 날갯짓을 끝마치고 남쪽 하늘을 향해 날아다니고 있다. 위에서 보는 풍경은 어떨지 궁금하다.


'누구나 실수는 하지. 그 친구도 말실수 한 걸 후회하고 있을 거야' 혼자 용서도 해봤다가

'남한테 상처 주는 말이나 내뱉고서는, 지가 잘될 일 있겠어? 두고 봐. 내가 꼭 갚아줄 거야' 혼자 응징도 해봤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사실 다른 친구한테 전해 들었는데, 올봄에 태미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청첩장을 전해받진 못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그녀와 나 사이에 아직 풀지 못한 실타리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네 번째. 태미에게 축의금 건네기


실타리를 풀다보니 네 번째 버킷리스트가 완성되었다. 그녀와 나 사이엔 용서도 화해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친구로서의 인연이 끝나 서로의 인생 무대를 엿볼 수는 있어도 참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갑을 열어보니 이번 달 용돈 20만 원이 두둑이 들어있다. 시장 상황에 따라 변동금리를 적용해야 하지만, 나의 지갑은 3년째 '고정금리' 이기에 축의금 10만 원을 따로 챙겨두었다. 이로서 내게는 뜨거웠던 여름방학의 기억 위를 뛰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 여유가 생긴 듯하다.


기억을 지우려고 애쓸수록 고통의 감정은 배가 되었는데,

기억을 안고 살고자 하니 내가 나로서 살아갈 힘이 생긴다.

'창피한 친구'라는 잣대는 내가 아니었지만

'친구를 보려고 2시간을 달려간 나'는 보인다.


이렇게 나의 인생 무대에도 하나 둘, 관객이 들어차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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