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식어가는데, 마실 줄 몰라요
#10. 황금 아르바이트생
엄마의 일터는 법원 정문 앞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복탕' 전문점이다. 일생에 주부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엄마가 자식들 먹여 살려보겠다고 선택한 식당일, 만만치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훨씬 잔인한 무대였다. 우리 모녀는 식당 장소부터 메뉴 선정까지, 세 달간을 머리를 싸매고 두 발이 뜨겁도록 뛰어다녔다.
그날은 막 초겨울이 시작되었던 터라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었던 것이 후회가 됐을 만큼 등줄기에 땀이 마르지 못했다. 두 시간을 걸어 다니느라 힘들어 잠깐 들린 법원 근처 식당에서 따끈한 잔칫국수 한 그릇 먹는데, 허겁지겁 먹는 우리 모녀를 보고 주인 부부가 넌지시 자리를 잡고 물었다.
"천천히 들어요, 무슨 사정이래? 여기는 법원 근처라 오시는 손님들이 죄다 울상에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엄마랑 딸이 맛나게 잘도 먹네. 더 드릴까?"
"괜찮습니다. 저희는 또 나가서 일 좀 봐야 해서요"
"일? 무슨 일인데?" 지나친 관심이 부담으로 느껴질 때쯤 엄마는 무슨 마음에서였는지 속 사정을 터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두 분의 마음이 호기심으로 그냥 한번 툭 던지고 만 질문이 아닌 추워서 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이 서서히 녹게 되는 위로로 느껴졌나 보다. 나만 모르는 어른들의 대화는 그 옛날 버스 자리가 났으니 앉으라고 안내해주고, 시장에서 나물을 파는 할머니에게 요리법을 묻다 나물을 까주고,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면 같이 들자고 말을 건네는 그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우리의 인생 스토리를 듣게 된 주인아주머니께서
"여보, 그 김씨네 가게 아직 그대로인지 전화 한번 눌러봐."
"........."
"아이고 저 인간이, 느려 터져 가지고. 이리 줘봐 봐. 내가 할게" 추진력 좋은 아주머니와 느긋한 아저씨가 토닥거리는 모습에 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데, 엄마는 씁쓸한 미소를 건네고 있다. 그녀가 외로움을 느껴서인지, 재혼에 대해 새삼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엄마의 옆자리는 비어있다.
국수 아주머니네 가족과 인연을 맺고 산 지도 2년이 넘어간다.
이제는 가게문을 열어놓고 인사를 건네러 들르고, 음식을 나눠 먹고, 서로의 자식 이야기를 화두로 매일을 보는 이웃사촌이 되었다.
"아줌마, 요새 호준이는 좀 어때요? 아직도 사춘기?"
"어이구, 그놈 자식 방에만 처박혀서 무슨 놈의 총싸움만 쏴대는지 컴퓨터를 부술 수도 없고, 너 같은 딸을 못 낳은 내 죄지 머. 딸이 최고야, 그렇지? 연주 엄마?"
"호준이가 커서 효도할지 아무도 모르지. 세계 최고 부자 게이머" 아저씨의 여유로움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인연'이란 게 새삼 신기하고도 위대한 건 우리가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꽃 중에 아는 꽃을 발견했을 때 나와 그 꽃은 연결되기 시작한다. 관심을 갖게 되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장미꽃...'하고 이름도 불러준다. 어느 곳에서 어느 시간에 만나건 장미꽃은 반가운 꽃일 것이다.
우리 가족의 장미꽃인 국수 아주머니는 잔칫국수만 잘 마는 게 아니라, 소맥 말기도 으뜸이라고 한다.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검사들이다. 내 생각에는 법원 근처에 식당이 위치해있고, '방'으로 구성된 구조 때문인 것 같은데 국수 아주머니는 '복탕'이 비싸고 엄마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라고 한다. 아주머니가 가끔 우리 가게에 놀러 오셔서 검사분들에게 소맥 한잔씩을 말아주시곤 하는데 맛을 보시고는 "캬아, 복탕 먹으러 온 건지 이거 마시러 온 건지 헷갈립니다. 사장님" 하며 너스레를 떠시는 분도 있다. TV에서만 봐오고 상상했던 사무적인 검사의 모습이 아니라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제는 나도 같이 웃게 되는 친근함이 생겼다.
가끔씩 점심시간에 단체 예약이 잡히면 엄마 혼자서 일하기 버거울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다. 식당 주인이면서 요리도 하고 서빙도 하는 엄마 곁에는 계산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하는 아르바이트생 딸이 있다. 비록 일당도 없고 공부 시간도 비워야 하지만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꽤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생이다. 어려서부터 엄마와 같이 집안일을 해냈던 재능도 있었지만, 하고 나서 받게 되는 '보상'이 늘 나를 행복하게 하였다. 햄이 가득 들어간 볶음밥, 시원한 아이스크림, 이 두 개면 엄마를 도와야 할 이유는 충분했었던 것 같다. 오늘은 점심 손님이 가고 나면 '아귀찜'을 해주시기로 했기에 나의 재능이 최고치로 향할 때쯤 '형사 2부' 검사 10명이 들어오셨다. 방으로 안내를 해드리고 주문을 받으려는데 "30분 뒤에 와주세요"라는 짧고 간결한 말을 건넨다.
몇 분 후 주문을 하러 들어갔을 때도, 음식을 건넬 때도 노크를 하게 되는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는데 1명의 여감사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검은 양복 사이에서 눈에 띄는 하얀 정장을 입고 칼같이 반듯한 단발머리에 연한 화장을 하고 앉아있는 그녀는 누가 봐도 기품 있어 보였다. 비교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거울 속 내 모습이 그녀와 오버랩되면서 한숨도 나왔다.
점심 장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형사 2부' 검사 방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내가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을 찾고 있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들어가 보니, 테이블 중앙에 앉아서 1시간이 넘게 근엄한 얼굴을 짓던 '형사 2 부장'님이 봉투를 건네신다.
"우리가 올 때마다 방으로 예약 잡아달라며 요구사항이 많지요? 그래 놓고는 오래 앉아있어서 다른 손님들도 못 받고,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머님이 늘 맛있는 음식 해주셔서 저희 오늘도 잘 먹고 갑니다. 따님이 고시 공부한다고 들었어요. 얼마 안 되는데... 오늘 아르바이트비라고 생각해주세요. 꼭 합격하시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순식간에 9명이 방을 나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일어선 여검사가 나를 보며 인사를 건넨다.
"저희 엄마도 식당 하세요. 저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엄마 식당 한번 가 본 적 없는데, 대단하신 것 같아요. 어머님이 참 뿌듯하시겠어요."
연한 화장에 감춰지지 않았던 그녀의 눈 속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눈물이 고였다.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해질 거라는 나의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이 행복하지 않는다면, 내가 합격을 한 들 돈을 많이 벌든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녀의 고백이 알려주었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아귀찜에 밥을 비벼 먹으며 수줍게 고백했다
"엄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